[북크로싱1차] 장미 이름은 장미
북크로싱 1차 8월 1일(월)오전7시
장소:정왕중심상가로 스타벅스
책:장미의 이름은 장미
참석자:강현숙, 김의경, 백재은, 이용규, 이시연,
전병석, 정종윤, 정희영, 조은옥,
기록:허정임
이 사람들은 분명 美친게 맞는게야! 아침 7시에 북토크라니!
비몽사몽 아니면 바쁜 출근시간대 후다닥 나온 정신이 맑을까? 새벽 아침이 맑아 맑은 정신에 독서토론이 좋다고 하지만, 초췌한 얼굴은 가릴 수 없다는 사실.
1년 전 제안한 북토크는 전병석선생님으로부터라지? 끊임없이, 쉴새없이 뭔가를 만들어내고 끄집어내고 끌어들이는(?) 그들의 세계는 이제 끈끈하기까지 하다. 분,초가 지날수록 점점 맑아지는 그들의 정신은 한시간을 가득 채워 ‘장미의 이름은 장미’를 읽은 느낀점을 크로싱한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를 읽고 생각나는 단어를 키워드화 하면?
4개의 소제목에서 2개의 소재만이 다뤄졌다. 하고 싶은 말도 생각해야 할 것도 많지만 주어진 시간은 한정 되있다.
나는 상대방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하는데 상대방은 불편할 수도 있다. 과연 ‘배려’라는게 누구를 위한건지, 배려를 할 때는 상대방 입장에서 해야 하는거 아닌가? 그건 대화를 통해서 가능한건지, 어떤게 필요한지, 어떤 걸 원하는지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다.
비슷한 맥락이긴한데 우리가 바라보는 ‘진실’과 뒷면에 있는 ‘사실’이 같을 때도 있지만 다를 때도 있다라는 것을 늘 생각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이 글을 보면서 내가 보는 현상에 대한 진실과 친구의 의도 또는 서로 다르게 생각하는 사실은 조금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 남는 느낌은 ‘현실도피’였다. 떠나는 사람들마다 이유가 다르겠지만 그 안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속 시원하게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 쫓기듯이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사는게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친구들과 여행갔던 것이 생각났다. 너무 달랐지만 자기는 배려라고 했던 게 ‘내 꺼를 왜 헤집고 다니냐’ 하는 공감된 부분이 있었다.
키워드를 꼬집어 내지 못하겠다. 민영이가 승아한테 미국으로 언제든지 오라고 하는 말을 믿고 갔는데 그 친구의 태도는 상상했던 반가움이 아니었고, 지리도 모르는데 혼자 버려진듯한, 그래서 우리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소위 접대용 멘트라고 말하지 않나? 상대는 그냥 인사말이었던건데 ‘어머~ 진짜 오네?’ 이렇게 민영이가 생각했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친구 간에 그런 차이가 있지 않았을까... 긴밀하게 날짜를 조정하거나 상황을 주고 받지 않고 승아가 일방적으로 간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현실도피를 위해 그랬을 때 ‘언제든지 와.’ 라는 건 시차나 거리를 생각할 때 훅 오리라고 생각 못 했을 수도 있고, 자기만의 생활 루틴이 구축되어 있었을텐데... 우리가 대화할 때 꼭 내 마음에 있는 진실만을 얘기하고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되는건지 그런 걸 생각하게 된다.
민영이와 승아의 성격을 비교하게 됐다. 상황을 대처하는 방법이 달랐다. 나라면 어땠을까? 그 방법을 택했을까? 과연 최선이었을까? .
승아가 어떤 감정으로 일정을 조정해서 가게 됐는데 그 상황 안의 모습이 ‘얼마동안...’이라고 하는 유한한 기한이 있어서 견딜 수 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동안 어디를, 현실도피든 여행이든 환기를 위해 가는데, 유한하니까 가능한 것 같은. 서두에서 민영이가 진짜 환대하는건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간에 대한 유한이 사람을 의미있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정한 키워드는 ‘인생의 유한’이다.
너무 어둡다. 승아가 공항에 내려서 갈 때까지도 우중충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거기서 이 사람의 마음이 그렇구나... 작가가 그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자기 생각을 얘기해서 이해하기보다는 서로 알아주길 바라는 게 있는데 그걸 서로 알고는 있지만 말이 안 되는 것 같은? 등장하는 사람들도 번듯하게 살진 못 하지만 루저라고 표현되는 삶을 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그런데 결국은 그 모습에 갇혀있는 듯한, 서로 배려를 한다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배려라고 생각되어지지않는, 결국 나만의 배려인 듯한 느낌?
또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서 민영이가 나쁠까, 승아가 나쁠까?
나쁘다는 표현보다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밥 한번 먹자’는 아무한테나 인사치레로 많이들 한다. 밥은 정(情)인데 필요에 의해서 만난다는 건 시간을 낸다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유지에 있어서 괜찮은 사람과의 밥(식사자리)은 좋지만, 인사치레로 하던 불편한 사람과의 밥은 체한다.
책에서 승아는 민영이의 이기심으로 인해서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데 민영이의 입장과 승아의 입장은 다르다. 책을 보면 그렇게 오랜 시간 민영이의 이기심에 상처를 받고도 또 이렇게 당하고 있는 자신의 한결같은 성실성과 적응력이 표현되는데 쭉 읽어보면 또 다르다. 내가 본거는 진실이 아니라 포장된 삶이었다. 내가 바라보고 싶은 관점으로만 바라본거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 것은 정말 배려라고 한다면 우리는 다르다고 하지만 승아가 일방적으로 ‘일방통행을 하고 있었다.’라는 그런 부분에서 서로의 삶이 달랐던 거다. 이 책을 읽은 아이들은 누가 더 나빴을까?를 물으면 답이 나온다. 누가 더 나빴을 때부터 분석이 시작된다.
공원에서 마지막 문구에 나오는 게 있다. 승아가 ‘저기 건너편은 어디야?’ 라고 물을 때 ‘여기서 봐야 한눈에 볼 수 있어.’ 라고 한다. 좀 떨어져서 봐야 다 보인다고 하는 말에 모든 걸 다 함축했다고 정의했다. 캐나다 갔을 때 사 남매가 뭉친게 처음이다. 책을 읽으면서 캐나다에서의 여행이 오버랩 됐다. 큰 시누이는 계속 누군가에게 뭘 해주고 싶어한다. 작은 시누이는 집 앞도 모른다. 여러 명 중 한 명이 정확한 걸 좋아해 입는거, 신는거 등등 선택을 못 하게 한다. 오랜 세월 익혀진 생활은 바뀔 수 있다. 나이를 먹으면서 그것들은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승아와 민영이의 관계가 공감되면서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생각이 섞이면서 사람과 사람,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그래서 때로는 남편한테도 뭐를 하려다가 이 사람이 싫어할까, 좋아할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다. 뭔가를 기대하고 읽었을 때 실망감이 컸다. 나름 기대하면서 분석을 했는데 기대와 달라진 작품이다. 책을 덮으면서 깊이 있는 책이구나, 내가 몰랐구나 하는 걸 느꼈다. 머릿속에 남는게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채워지는 삶을 좋은 것으로 보상받고 싶은 욕구가 보였다.
민영이를 보면서 나쁘다고 할 수 없는게 민영이도 거기에서 삶을 유지하기가 너무 힘든데 승아는 기대감을 갖고 갔기 때문에 그게 깨진거고, 민영이 입장에서 승아가 약간 철부지 같이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각자 자기가 처해진 입장에서 보게 되는 것 같다.
‘장미 이름은 장미’를 읽으면서 등장인물 모두가 다 다르고 상황도 다르고 그래서 관점에 따라 해석과 분석이 달라지는데, 나를 인정하고 너를 내가 인정해주고 어른이 되면 늘어나는 걱정, 자아 성찰도 계속 해야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남의 평가를 너무 많이 의식하고 있다. 자기 생각을 얘기하는 걸 주저하는 삶을 나도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이 있었다. 일정 부분 내 얘기 같다는 부분도 있었다. 언젠가부터 마음속에 있는 얘기를 겉으로 드러내기 위해 변화를 시도했다. 모든 사람이 나랑 같구나 라는 공감이 서면서 조금 불편하더라도 얘기할 상황이 됐을 때 얘기를 해주는 게 상대방이 더 편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정리하고 존재에 대한 인식을 하면서 질적으로 재미와 행복을 위해 만나야 될 사람, 해야 될 일을 위해 내 삶에 대한, 내 존재에 대한 생각과 다른 사람이 내게 부여되는 어떤 의미등을 계속 인식하면서 적절한 거리를 두게 된다. 의미가 있든 없든 부여하든 그렇지 않든 장미의 의름은 그저 장미다.
장미가 갖고 있는 논리성은 나를 지키기 위한 가시다. 우리 인간은 내가 왜 그렇게 했냐면? 이라고 분명히 말을 한다. ‘어쩔 수 없었어. 나의 선택은 필수였어.’ 등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다보면 나를 지키고자 하는 가시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장밋빛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