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소설

제4화 여자라서(가칭)

1인 미디어 2024. 12. 31. 12:46

한 사람은 영화배우 뺨치는 허연 얼굴의 미남형이고 또 한 사람은 남자답게 적당히 그을린 얼굴의 서구적인 호남형이었다. 순간 영임의 얼굴이 벌개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모습을 본 영자가 옆에 있던 순자의 팔을 툭 치며 턱으로 영임을 보라고 신호를 한다. 개구진 미소가 장난기 서리게 흘겨본다. 귀엣말로 싫다더니 내숭이야 기집애~ 하며 큭큭대고 웃는다.

 

동만오빠, 철중오빠 여기!”

 

동만과 철중은 친구들을 슥 하고 쳐다보다 영자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바로 앞에 앉은 영임을 슬쩍 쳐다보고 영자에게 손짓으로 커피 두 잔 시키라는 신호를 보낸다.

 

~ 영자 친구들이래서 별 기대하지 않고 나왔는데 다들 미인이시네요.” 검게 그을린 피부를 가진 서구적인 얼굴을 한 철중이 너스레를 떨며 입을 뗀다.

 

! 기막혀! 오빠! 이래봬도 우리 서울 아가씨들이라고! 서울깍쟁이!”

 

넌 숙녀분들 앞에서 무슨 실례되는 말이냐~” 말은 친절하면서도 표정은 동조하는 빛이 역력하다.

 

! 그런데 철중오빠! 오늘 오빠 소개해줄 친구가... 사실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자가 영자의 말을 자른다.

 

안녕하세요. 김영자예요.”

수줍게 잔뜩 내숭떠는 매무새로 인사를 하니 친구들이 기막히다는 듯이 쳐다본다.

 

야 너 사귀는 사람...’

쉿 조용히 해. 일단 만나보는거지 뭐

 

영임..이라고 했나?”

? , ..”
듣던대로 아주 조신하고 여성스럽게 생기셨네요.”
오빠! 영임이 얘 이 동네에서 아주 내로라하는 부잣집 맏딸이야. 얘 잡으면 오빠는 봉 잡는거라고.”

 

, 무슨 그런 말을..”

알고 있어.”

 

영임은 놀란 눈으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알고 있다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었다.

사실은 내가 영자한테 영임이 소개시켜 달라고 졸라댔지. 그런데 결혼도 연애도 전혀 관심이 없다고 안된다 그러더라고.”

 

맞아. 그래서 내가 좀 시달렸어야 말이지. 그래서 일단 만나게는 해주는데 그 다음은 알아서 하라고 하고 이 자리가 만들어진거야. 영임아!”

?”

오늘 만나보고 아니다 싶으면 거절해도 돼. 차도 된다고

 

영임은 곤란한 듯 멋쩍은 표정을 짓고 친구들은 그저 재미있다는 듯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철중도 소개의 대상인 경자보다 영임에게 시선을 더 많이 보냈다.

 

그런데 두 친구는 결혼을 했고 여기 두 친구는 결혼을 아직 하지 않았고?”

네 오빠. 저랑 순자만 결혼해서 얘는 애가 하나, 나는 둘 있고 영임이랑 경자는 아직이에요.”

이름들이 아주 재밌네. 순자, 경자, 영자, 영임이만 혼자 영임이네?”

그러니까요. 희한하게 영임이만 이름이 이쁘고 우린 모두 촌스럽고 자 돌림이예요. 그래서 일명 자세자매인데 어머, 우리 무수리야?” 말 끝에 스스로도 웃기던지 서로 쳐다보며 까르르 웃어댄다.

 

, , 여기 계속 있을건가? 자리 옮기지?”

혼기 꽉 찬 남자 여자들이 대낮에 다방에만 주구장창 있는것도 우습겠다 싶었다. 잠시 망설이던 영임은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나갔다. 옮긴 곳은 선술집이었다. 술은 입에도 대지않아 술집이라고는 전혀 가보지 않았던 영임으로서는 낡고 어두운 선술집이 낯설었다. 시간은 아직 늦은 오후도 되지 않았다. 술을 마시게 되면 낮술이 되는건데 애비애비도 못알아본다는 낮술을 하게 될 판이었다. 그렇다고 모처럼 시댁과 남편의 허락을 받고 어린아이들까지 떼어놓고 온 순자와 경자를 두고 먼저 일어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리는 자연스럽게 순자, 영자, 철중, 경자, 동만, 영임 순으로 빙 둘러앉았다. 막걸리와 김치부침개가 나왔다. 노란 양은 술잔에 진한 색의 막걸리가 채워졌다. 순자와 영자는 쉬지도 않고 꿀꺽꿀꺽 잘도 마셨다. 술을 못마시는 경자는 물로 건배를 대신했고 영임도 홀짝거리며 반 잔 정도 비웠다. 그런 영임을 흘깃하며 시선을 잠깐 뒀던 동만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 친구들의 응원에 나머지 반절의 막걸리를 털어마셨다. 놀라웠다. 마시니 마셔졌다. 동만이 부침개 한 젓가락을 떼서 영임에게 먹여준다.

 

어머~ 남세스럽게 뭔 짓이람?”

영자가 느물스럽게 놀리듯 지껄인다. 순자와 경자도 가재눈을 뜨고 둘을 바삐 바라본다. 영임은 발그레한 낯빛으로 잔을 동만 앞으로 쑥 내민다. 또 한번 오~ 하는 소리를 낸다. 영임은 달작지근하게 입 안을 감돌고 속을 싸하게 쓸어내려주는 막걸리의 매력에 빠져 거푸 석잔을 마셨다. 취기가 오른 듯 살짝 어지러웠다. 그러나 기분은 좋았다. 노란 주전가가 하나둘씩 쌓여가고 주거니받거니 달아오른 낯빛만큼 만족스런 분위기의 술자리가 되었다.

 

선술집 밖은 그새 어둑해졌다. 저녁시간이 되자 선술집 안이 사람들로 가득찼다. 퇴근 후 한 잔 하기 위해 들른 사람들이다. 새우젓 동네로 유명한 마포 도화동 한강변에는 다방이나 술집들이 유독 많았다. 하루 수고한 노동을 막걸리 한 잔으로 풀고자 들어오는 사람들의 행색은 대부분 남루했다. 비릿한 냄새가 기름냄새와 섞여 삶의 진동을 느끼게 했다. 술잔이 부딪힐수록 목소리의 옥타브가 한단계씩 올라가고 거나한 낯빛들에서 취기가 서렸다.

아무리 허락받고 외출나온 처지라하더라도 결혼한 몸으로 더 이상 취하거나 늦은 시간이 버거었던지 순자와 영자는 슬슬 일어나야 할 시간임을 감지했다.

나 이제 가봐야겠어. 너무 늦은 것 같아.” 영자에 이어 순자도 거든다.

나도. 여기서 더 취하면 안될 것 같아.”

 

순자와 영자가 먼저 일어섰다. 영자는 이웃 동네에 살고 있지만 순자는 집이 멀었다. 한 동네에서 학창시절을 함께 했던 동무 순자는 인천으로 시집을 갔다. 영자는 염리동으로 신혼살림을 차렸다. 경자가 결혼을 하면 그나마 같은 동네에 같이 있게 될 터였다. 남자 쪽 집이 같은 동네라서다. 만약 그 사람과 헤어지고 오늘 나온 철중과 결혼을 하게 된다면 용산으로 가야한다. 동만도 집이 용산이다. 무르익은 술자리는 순자와 영자를 집으로 보낸 후 자연스럽게 동만과 영임, 철중과 경자만 남았다. 커플끼리 남았으니 그대로 헤어지는게 못내 아쉬운 그들이었다. 동만은 주저없이 간판도 메뉴도 없이 붉은 페인트 글씨로 양주라고 쓰여진 여닫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은 어두웠다. 어두운 백열등 하나가 넓지 않은 실내를 밝히고 있었다. 자욱한 담배연기가 케케하게 코끝을 자극했다. 순간 기침이 나면서 얼굴이 일그러졌다. 순간 무섭다는 느낌이 드는 영임이었다. 웬지 타락한 것 같았다. 내가 왜 여기에 있나... 순간 영임은 집에 가야한다고 돌아섰다. 동만이 잡았다.

 

이제 한창 기분 좋을때인데. 딱 한 잔만 하고 가.”

그래 영임아. 기왕 여기까지 들어온거 딱 한 잔만 하고 가자.”

철중과 경자는 죽이 잘 맞아보였다. 쑥스러움을 좀 타는 철중이라고 생각했는데 경자와는 대화가 잘 되는 듯 해보였다. 그렇다고 동만의 말솜씨가 뒤처지는 건 아니었다. 동만은 청산유수라기보다는 적당히 느물거리며 장난끼가 많았다. 또 적당히 매너가 있었고 허연 얼굴에 웃는 얼굴은 예쁘장하기까지 해보였다. 영임은 동만의 잘생긴 얼굴에 홀딱 반해버린 자신이 신기했다. 두꺼비 그림이 그려져있는 진로소주가 소주잔 가득 채워지며 두, 세 병 정도 오갈 때즘 경자와 영임은 이미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있었다. 철중과 동만은 그런 숙녀들이 귀엽고 사랑스럽다듯이 바라보았다. 철중이 취한 경자의 몸을 바로 세우며 깨웠다.

 

경자야 일어나자, 집 데려다줄게. 정신차려봐

동만도 영임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영임은 정신줄을 놓지 않고 있었다. 처음 마셔보는 술, 처음 오게 된 술집들, 모두가 신기했고 흥미로웠지만 정신만은 놓지않으려고 다잡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술에 취했다는 핑계를 대서라도 동만과 더 있고 싶었고 그에게 호감이 있노라 말하고 싶었다. 동만과 더 있고 싶은 마음과 집에 가야한다는 마음이 갈등을 일으켰다. 그러나 자칫 첫 만남에 쉬운여자고 보이기 싫어 이끌리는대로 밖으로 나왔다.

 

철중도 일어났고 경자도 일어났다. 술 취한 여자들을 어찌해 볼 생각을 할 수도 있을텐데 이 두 남자는 매너를 지키고 있었다. 과한 스킨쉽도 없고 어떻게든 일으켜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하고 있었다. 순간 믿음직스럽고 이런 남자라면 만나볼만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좀 더 기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영임은 술을 핑계로 휘청거리며 동만의 어깨에 살짝 기댔다. 순간 스스로 놀랬다. 자신에게 이런 여우같은 면이 있었나하고.

 

괜찮아? 걸을 수 있겠어?”

, 괜찮아요. 경자는..”

, 철중이가 데려다 준다고 앞서 걸어가고 있어.”

.”

둘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내를 걸으며 효창동 언덕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어두워지니 기온이 다소 차가워졌다. 술기운에 달아오른 체온이 시원해짐을 느꼈다.

힘들지 않아? 좀 쉬었다 갈까?”

아니 괜찮아요. 너무 늦어서 얼른 가야해요.”

 

한 번도 늦은 시간까지 외출을 한 적이 없어 취한 기운에도 걱정이 되었다. 걸을수록 점점 취기가 오르는 듯 했지만 정신만은 똑바로 차리려고 애를 썼다사람들이 점점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방이 짙은 어둠으로 세상을 집어삼켰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어둠을 가른다. 더딘 움직임이 낮은 흐느낌과 일체한다. 주섬주섬 앞섶을 여미는 영임. 옆에서 뿌연 담배연기 내뿜는 동만이다.

 

울지마. 너도 좋았잖아.”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오늘 본 사람. 잘 생겼고 말도 잘하고, 매너 있어 좋았던 사람. 이 사람이라면 계속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을 갖게 한 사람. 그런데...

 

《4화 끝 》 연재:매주 금요일 업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