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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염 끓였던 마을, 그리고 바라지-장경창


자염(煮鹽)은 바닷물을 끓여서 만든 소금이다. 바닷물을 끓여 증발시켜서 만든 소금이라는 뜻이다. 지금의 장현동, 장곡동, 월곶동, 정왕동이 소금을 만드는 동네였다. 자연 갯벌에 구덩이를 파서 바닷물을 담궈 끓여 만든 것이 자염인데, 소금장사들이 서울에 갖다 팔았다. 장현동 8, 장곡동 10여호, 월곶동 20여호, 정왕동 30여호 정도가 자염을 생산했다.  자염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이 좋았던 동네였다.

 

갯벌물이 들어오면 일주일정도는 물이 들어오지 않아야 한다. 물이 계속 들어오면 자염을 만들 수가 없다. 지대가 높고 갯벌이 길다라니 소금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이 충족 된 것이 바로 장현, 장곡, 월곶, 정왕이었던 것이다. 유독 이 지역에 주안염전, 남동염전, 군자염전, 소래염전등 염전이 많은 이유는 500년 역사에서 가장 비가 적게 오기 때문이다. 자염은 나무를 때야하고 힘이 들어 염전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자염생산을 그만두는 집들이 많아졌다.

 

이들 동네는 소금 굽는 동네이기 때문에 부촌이라 불리웠다.   농사를 짓고 소금을 구웠던 동네.400년 전, 장유선생의 시에도 나와 있다. ‘소금 굽는 푸른 연기가 저녁하늘에 날아간다는 시다. 자염의 역사는 그렇게 오래되었다.

 

이후 염전은 일본인들이 들어와 지었다. 천일염은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만든거다. 그리고 천일염은 역사에서 중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남쪽에서 먼저 시작했는데,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의 기후를 보고 군자면에 집중적으로 염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주안염전, 남동염전, 소래염전, 군자염전이 있는데, 없어진 순서는 주안, 남동, 군자다. 소래염전은 소래습지생태공원에 일부 남아있다.

 

당시 군자염전이 제일 컸다. 지역이 풍세가 적고 비가 적은 지역으로 우리나라 기상 관측 기록을 보고 집중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해방이후 일본인들이 물러나고 일본관사가 비어지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들어가 살았다. 빈집이니 네것 내것이 없었다. 그곳이 지금의 옥구공원이다.

 

소금이야기가 나왔으니 바라지 이야기도 해보려한다. 시흥시의 도시브랜드인 '바라지와 산업단지의 도시, 시흥'의 모태가 된 바라지 이야기다.

 

갯벌을 막은 것을 방죽이라 칭했다. 엇방죽, 뒷방죽, 앞방죽, 새방죽, 가물치방죽등... 시흥에는 방죽의 이름이 많았다. 방죽은 바다를 막은 것이다. 왜 막았을까? 농사를 짓기 위해서다. 바다를 막으면 처음에는 땅을 사용할 수 없다. 짠물이기 때문이다. 몇 년간 농사를 짓지 못한다. 이 상태를 바라지라고 한다. ‘못쓰는 땅을 바라지라고 한다. 쓰는 땅은 바라지라고 하지않는다. 바라지는 어떤 상태를 두고 칭하는 걸까? 못 쓰는 땅은 4,5년간 빗물을 받아서 버리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갈대를 심는다. 갈대를 뽑고 나면 피를 심는다. 2,3년 심고 뽑기를 반복한 후에 벼를 심는다. 벼를 심기 전까지는 못 쓰는 땅이다. 그런 과정을 겪고 나면 벼를 심고 생산을 한다. 벼생산을 위해 거치는 10년의 과정, ‘못 쓰는 땅이지만 언젠가는 이롭게 이바지할 땅, 그래서 바라지. 언젠가는 이바지를 할 땅이다. 이것이 정확한 바라지의 뜻이다. 예부터 내려오는 이름으로 전국적으로 바라지라고 불리우는 땅이 많았다.

 

언젠가는 이로움을 줄 땅이지만 이름이 없으니 바라지라고 불리운거다. 어린 시절, 둑방을 막으면 생기는 웅덩이에서 게도 잡고, 헤엄도 치며 놀았다고 한다. 그 바라지땅에서...

 

바라지에서 10년을 인내하며 견뎌 낸 세월, 지금은 이로운 땅이 되었다. 대표적인 그 땅이 호조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