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순 염반장의 소금꽃 이야기
갯골의 가을햇살이 소금꽃 피어내는 소금창고에서
시흥염전 57년 외길 걸어오신 김연순(포동,74세)염부반장을 만나보았다.
연세에 비해 아직도 정정하신 모습은
햇빛에 말간 모습 드러내고 있는 염판 위의 소금과 닮아 있었다.
봄에 갈대 잎 쭉 뻗어 올라 올 때 가운데를 보니 심하게 쭈글쭈글 거려있었다.
그래서 올 7,8월경에는 비가 적게 오겠다 싶었다.
염전 일을 하다보면 날씨의 예측도 하게 되는데 역시 가물었다.
이 때 갈라지는 염판에 물을 대 소금을 생산하는데
발휘돼야하는 것은 염반장의 능력이다.
김연순 염부반장은, 1942년 이북황해도에서 태어나 1.4후퇴 때
백령도와 대청도를 거쳐 13살에 시흥시 포동에 왔다.
14살에 포리초등학교 4학년으로 들어가 5회 졸업생이 되었다.
염전일은 17살부터 시작했다.
당시 대한염업주식회사에 아버지를 따라 처음 들어가
질통에 소금을 담아 져 나르는 소금출하 일부터 하게 됐다.
지금은 성담에서 차로 이동하라고 해 도로를 내어 편리하게 출하를 하고 있지만,
그때는 멍텅구리배로 출하해서 갯골로 지나갔다.
나중에는 가시롱차가 생겨 이동하기도 했다.
군대 갔다 와서부터는 난치반장을 맡아 일했다.
직책에는 염전반장, 난치반장, 부반장이 있는데,
성담이 인수 한 후부터는 10정보당 반장 한명에 부반장 한명이 맡았다.
난치반장이 신경을 많이 쓰면 소금을 많이 내므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소래염전은 갯골을 중심으로 부흥교 넘어
포동500구, 방산동400구, 포동500구, 소래100구, 월곶200구, 갯골300구가 있다.
1구당 배정되는 인원은 10명이다.
처음에는 500구에서 일하다 방산동 400구에서 일했다.
포리초등학교 근처라 가까워서다.
예전에는 물이 층층으로 내려와 물꼬만 틀어놓으면 편했는데
지금은 기계로 하기 때문에 지켜 서 있어야한다.
물도 예전에는 2개구에 하나씩 저수지가 있어 물이 필요할 때 양수기로 퍼 올렸다.
그런데 1997년도에 40년간 하던 염전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회사가 문을 닫은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됐으니 얼마나 난감했겠는가.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건축 일을 하게 됐다.
신천리의 뉴월드아파트를 비롯해서 대우3차아파트,
월곶의 풍림1차아파트에서 일을 하고 부천까지 다니다
2003년도에 갯골에서 염부장하던 사람이 오라고 해서 오게 됐다.
와서 보니 염전을 만들고 있었다.
도랑을 너무 깊게 파서 다시 메꾸는 작업을 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소금 낼 준비를 하기위해 겨우내 담아놓은 물을 깨면서 다대기 작업을 하는데,
염전생활 중 봄이 가장 힘들다.
지금은 장화를 신지만 당시에는 맨발로 했다.
한여름 땡볕아래서 일할 때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지금은 예전,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모두 죽고 없어 혼자 남아있는데
다음 대에 염부 일을 하러 누가 올지는 모르겠다.
힘들기 때문이다.
힘들어도 가끔 생각나는 추억이 있다.
옛날엔 수차를 양쪽에 와이어로 고정시켜 돌렸는데
물을 퍼댈 때 무게가 없으니까 잘 안돌아갔다.
물에 빠지면 옷이 젖으니까 팬티바람으로 돌렸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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