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노인정의 정윤종(장현동,68세)씨가 태어난 곳은 자연부락이었던 시흥시 장현동 227번지. 1995년 이후 택지개발로 인해 없어진 새재마을인 지금의 장현동이다.
연일정씨 31대손으로 12대 윗대 할아버지의 묘가 두일마을 산25번지에 모셔져있으며, 100여개 정도 있던 11대, 10대, 9대 조상들의 묘는 개발로 인해 납골당에 모셔져있다. “연일정씨가 400여년 정도 살고 있어. 시흥의 주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새재마을은, 시흥군 군자면 장현리의 주소로 ‘새 조’자 ‘고개 현’자를 따서 鳥現부락이라고 명명했었다. 새재마을의 지형을 보면 산이 내려오다 아늑하게 감싸는 형태를 하고 있어 추운겨울에도 따뜻하고 땅도 옥토다. 그래서 새재마을을 ‘살기 좋은 마을’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민들의 생계수단은 주로 농업이었는데, 1953년도부터 물왕저수지의 물을 하상동 뒷산에 굴을 뚫고 물길을 내어 방죽에 넘치게 했는데 이로 인해 벼농사도 가능해졌다. 또한 바다의 짠물과 밀물이 교차되는 지점이라 가물치가 많았는데, 방죽의 지형이 깊어 물이 안 빠졌다. 붕어낚시에도 걸리는 게 가물치였을 정도로 많았으니 유명세는 대단했다.
군자중학교의 전신, 장현강습소
장현리에도 천석꾼이 있었다. 발만 닿으면 다 그 집안 땅이었다. 그러나 토지개혁으로 소작농들에게 나누어졌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쩌면 군자중학교가 시청 앞에 있는 모범산 아래로 이전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6.25당시 아저씨뻘인 정재익씨가 장현강습소 고등공민학교를 세웠다. 정재익씨가 교감으로, 외부에서 최긍렬씨가 교장으로 부임해 학교를 운영했다. 최긍렬교장은 매우 유능했으며,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러나 터가 좁아 교실 따로 운동장 따로 사랑채 따로여서 불편했다. 당시에는 교육청에 돈이 없어 유지들의 협조로 학교가 세워졌는데 면소재지인 군자면이 조건이 좋아 이전하게 된 것이다. 정윤종씨는 장현강습소 고둥공민학교의 전신이 된 군자중학교 7회 졸업생이다.
아낙들의 기우제, 돌다리우물 속 금괘를 지켜라!
둔터골에 가뭄이 들면 동네 아낙들은 징을 치고 춤을 추며 우물로 가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새재마을에 전해져오는 전설에 의하면, 우물 안에는 금괘가 있는데 우물 안의 물을 모두 퍼내면 금괘의 존재가 드러나니 그것을 사람들이 가져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비를 내려 우물을 채운다는 것이다. 자연적인 우물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비가 오지 않으면 아낙들은 모두 그 우물로 가서 물을 퍼냈고 남자들은 접근하지 못했으며, 하늘만 보고 농사를 짓는 농사꾼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식이 되었다고 한다. 우물의 이름은 돌다리우물이며 불과 30년 전 만해도 제는 이루어졌다. 지금은 개발로 인해 사라지고 없다.
군자농업협동조합의 위력!
해방되기 전 面마다 있던 금융조합이 5.16혁명 전에는 里마다 농협이 생겼다. 혁명이 일어난 후 70년대 초에는 면단위로 하나씩 생겼는데, 리와 동이 합쳐진 것이다. 예를 들어 군자면, 수암면, 소래면이 그것이다. 장현리에도 농협이 있었다. 그때는 리장이 조합장의 역할을 했다. 이장은 차로 비료를 싣고 와 나눠주고 주민등록도, 출생신고도, 심지어 주민들의 인감도장까지도 모두 가지고 수행하던 때였다.
그러나 돈이 없어 조합원들에게 대출도, 직원들에게 봉급도 줄 수 없었다. 실질적인 농협의 역할은 70년대 후반에 하게 됐다.
정윤종(장현동,68세)씨는 1983년 선거를 통해 37살, 전국 최연소 조합장이 됐다. 직원이 21명이었다. 하지만, 예금이 20억에도 못미처 대출해 줄 돈이 없어 대출을 해줄 수 없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조합원 한 명이 술을 잔뜩 마시고 들어와 “대출도 못해주는 사람이 뭐하러 왔냐!” 며 따지는 것이다. 그때는 땅이라도 팔아서 대주고 싶었다. 그러다가 반월공단이 생겼다. 홍보를 해서 농협이 다 끌어 모았다. 그래서 어깨에 힘주고 일할 수 있게 됐다. 고금리의 사채가 많았던 시절, 농사짓는 이들에게 농협은 큰 역할을 했다. 주요성과는 1985년도에 60억, 1989년도에 100억, 1990년도부터는 전국에서 1등을 한 것이다. 지금은 1조가 넘는다. 현재 농협조합원의 수는 3,820명이다.
1983년 당시 농협의 주요사업 중 하나는 복숭아농사였다. 신천리에는 포도가 군자농민들 사이에서는 복숭아농사가 있었다. 정왕동주변 산에 복숭아밭이 많았다. 농협에서는 복숭아를 수확해 서울 공판장에 출하시켰다.
장현노인정 안 벽에는 옛 새재마을의 풍경이 파노라마 사진으로 걸려있다. 사진 속 가가호호를 짚으며 “이 집이 내가 살던 집이고, 이집이 천석꾼집이야. 여기가 학교 운동장인데 학생들이 목도로 군사훈련을 했지.”라며 아쉬움 속에 옛날이야기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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