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당, 한옥집에서 맛있는 가마솥밥과 시원한 김치찌개를 먹고 바로 옆에 있는 안양박물관을 방문했다.
박물관 부지는 827년에 조성 된 증초사지 당간지주(보물 제4호), 고려시대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4호)과 안양사지의 흔적을 확인 할 수 있는 역사적 공간이다. 박물관 건물 일부는 한국 근현대 건축의 거장인 김중업(1922~1988)이 설계한 (주)유유산업 안양공장을 리모델링하였다. 안양박물관과 김중업박물관은 안양의 뿌리와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자 건축가 김중업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장소이다.
뒤에 보이는 두 개의 지주대는 당간지주로 부처와 보살의 공덕과 위신을 기리는 불교 용구인 당(일종의 깃발)을 달기 위한 당간(깃대)을 고정해주는 역할을 했다. 지주대 사이에 보이는 중초사지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의 일반형 석탑이다. 1960년대 공장이 건설됨에 따라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는데 훼손되어 있던 탓에 보강을 하였다.
김중업박물관 앞에는 건축가 김중업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는 1988년 타계한 건축가 김중업을 기리기 위하여 자손들의 기증으로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되었다.
안양박물관은 2017년 9월 28일 개관하였다. 입장료는 무료이며 안양예술공원 초입에 위치해 있다.
이 자리는 고려시대의 절인 안양사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페사된 후 1959년 당시 유유산업(유특한) 안양공장이 들어섰는데, 2006년 제천시로 이전하면서 빈 터가 될 상황에 있었다. 이에 시에서 인수, 시민을 위한 전시 및 체험 그리고 교육과 휴게공간을 만들었다.
그러나 리모델링의 계획을 폐기한 과정이 있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공장 입구 근처에 신라시대의 절인 중초사 탑과 당간지주 뿐만아니라 주변에 상당한 유적들이 발견되어 2008년부터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다고 한다. 과정에서 건물의 초석군과 기단열, 기와 폐기층이 확인되어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유물은 쏟아졌고 안양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와 전돌, 치미, 연꽃 형태의 조각, 금당지, 승방지등이 발굴되었다.
당장의 계획에 차질이 있더라도 유적발굴조사의 의지와 시간이 더디더라도 지나치기 쉬웠던 부분까지 들춰내어 발굴하고 이를 보존하며 아울러 주민들의 공간으로 만든 것은 잘한 것 같다.
이 기둥들은 사라져가는 문자들의 정원에 놓여져 있는 설치작품이다. 옛 유유산업의 공장건물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남겨진 24개의 기둥에 잊혀져가는 안양의 기억과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24개의 기둥들 중 가운데 8개의 씌어진 조형물에는 수에르설형문자, 고대그림문자, 훈민정음, 중국문자와 같이 현재 거의 쓰이지않아 사라져가는 여덟개 민족의 문자들이 새겨져있다.
안양의 청소년들과 주민들이 안양의 역사를 공부하는 교육관이다.
김중업은 한국을 대표하는 근현대 건축가다. 치열한 작가의식을 가지고 끝없는 복원적 가치 탐구를 추구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그에게 있어 건축이란 본인의 영혼이 함축된 표현물이자 강렬한 작품성을 지니는 마음의 시적 울림이다.
건축, 시적 울림의 세계.
건축은, 문화고 예술이고 고독이고 인생인 것 같다.
김중업의 작품과 그 세계, 과정들을 둘러보며 투철한 작가의식에서 비롯된 건축적 사고와 작품성은 세계적인 수준의 건축물로 인정받기에 충분해보였다.
그의 초기 작품은 한국 근현대 건축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건축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 속에 담고자하는 휴먼은 느낄 수 있었다.
잠시 감상을....
김중업은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당시 성남시(당시의 광주) 개발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1971년 11월, 강제 출국 당했던 일이 있다. 또한 김중업 건축사무소가 세무조사를 받으며 엄청난 세금을 내게 되었다. 이후 파리로 가게 된 김중업은 반체제 인사로 분류되어 귀국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서 언제 귀국하게 될지 모르는 가운데에서도 건축가의 꿈을 이어나갔다.
서울 삼일빌딩은 김중업에 있어서 비운의 씨라고 표현되어 있다. 31층 높이를 최소한으로 줄여서 빔을 뚫고 닥트를 배열하여 날씬하게 보이려고 애를 썼지만 끝내 설계비조차 받지 못했고, 엄청난 세금에 밀려 성북동 집까지 잃게 되었다.
그가 귀국했을때는 많은것이 바뀌어있어 쉽지않은 길을 걷게 되었지만 건축에 녹아내는 그의 철학은 고독한 시인의 깊은 울림처럼 한 길을 걷게 하였다.
[아이들의 집짓기 놀이터]
박물관으로 리모델링 된 이 건물은 (주)유유산업 안양공장이었다. 1959년에 설계한 초기작품이다. 박스형 건물의 자유로운 입면과 평면의 추구는 건물을 지탱하는 구조체로 다양한 형태와 공간의 조작이 가능하다.
유유산업 사무실의 벽체는 유리로 처리되어 건물의 투명성과 개방성을 높혔다. 단순하고 간단한 기능은 건물의 명쾌한 구조체계와 벽면분할로 높은 작품성을 지니며, 김중업의 초기 작품을 특징짓는 요소가 된다.
[3세대 맞춤형 카페인듯...]
어르신들을 위한 다과방, 아이들을 위한 놀이방, 젏은층을 위한 테이블, 개인 활용공간, 그리고 추억의 과자까지 소소하게 구성되어 있다.
[발굴 모래체험]
화면에서 제시한 유물정보를 보고 모래를 헤집어 찾아내는 놀이다.
박물관 2층에는 선사시대 유적과 안양의 역사가 전시되어있다.
[정조대왕의 어가행렬]
어가행렬을 미니어처로 재현해 놓았다. 화면에서는 어마어마한 어가행렬이 상영되고 있다. 행차인원만 내.외빈 포함 약 6천여명...
이 대목에서 아.... 도일시장박물관... 아... 시흥사박물관.... 꿈만 꾸어야 하나요...ㅠㅠ
[문헌에 나타난 안양사]
고려부터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문헌에 나타난 안양사의 모습을 통해 600여년 안양사의 발자취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안양사 초기에는 주로 창건 유래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찰로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시대 사찰은 교통로의 주요 골목에서 지역 경제의 거점으로 편의시설을 제공하는 한편 여행객의 숙소와 영접, 환송을 위한 원의 기능을 하였다. 고려시대 안양사 역시 종교적 수행과 함께 일정 규모의 시설과 재정적 부가 축적된 사원으로서 지역의 주요 교역과 경제적 거점지 역할을 하였다.
안양사의 경우 조선 전기에는 국왕의 탕목과 휴식, 그리고 지방 관리의 휴게 공간으로 활용된 기록이 남아있다.
특별전시관은 둘러보지 못하고 다음 일정 때문에 서둘러 나왔다. 다시 한번 방문하여 더 자세히 보아야겠다는 아쉬움을 뒤로 한채... 총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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