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에서 가장 오래 된 무지내감리교회라고 아시나요? 120년의 역사를 간직한 교회입니다. 이보다 3년 뒤에 지어진 오래 된 시흥 군자동의 군자교회도 있지요. 그리고 인천에는 내리교회, 미산감리교회는 내년에 120년이 됩니다.
지난 9월 29일 경기도 시흥시 금오로 118번 안길 19-4를 주소로 둔 무지내교회에서는 김동현전도사와 장명덕전도사의 기념비 제막식이 있었습니다.
시흥과 안양, 안산, 광명지역에서 첫 번째로 지어진 무지내교회가 아펜젤러의 복음으로 120년을 전파해왔습니다.
이 교회가 세워질 당시 뜻 깊은 인물이었던 장명덕전도사와 김동현전도사를 위한 기념비 제막식이 기독교대한감리회 중부연회 시흥북지방회 실행부위원회의 주관으로 거행되었는데요,
1898년 12월 1일 설립된 무지내교회. 교회가 한세기를 지나 그 자리에 오랜 동안 머물러 있다는 것은 세월의 역사성과 함께 서민들의 생활상이 그대로 녹아있는 시대의 반영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할 것 입니다.
무지내교회는 대한제국 시기에 설립되어 역사가 깊은 만큼 교인들의 신앙 생활 터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울고 웃는 삶의 현장, 격변의 세월을 함께 한 교회 안의 사람들. 교회를 단순히 종교적인 입장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가장 아래, 민초의 삶이 가감없이 들어가있기에 교회 자체가 곧 인간의 삶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마음의 위안을 서로의 마음으로 의지한 채 가장 정직하게 살았을 무지내동의 삶.
무지내 출신의 선교 및 성산교회 개척자인 장명덕(1901~1990)전도사는 일제 강점기 여성 교역자이자 교육계몽가로 활동한 무지내교회 출신이라고 합니다. 장명덕은 1901년 시흥시 무지내동에서 출생하여 5세 때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뒤로 신앙에 깊숙이 들어가 공부를 하고 강습소를 설립, 교사로 활약하다 1933년 정식 전도사로 천곡교회에서 파송받아 봉사에 임하고 1940년 인천 화도교회 재직시 일제의 신사참배에 거부하며 일체의 교회 사역을 중단하였다가 해방 후 감리교회 안식관 관장을 역임한 후 1990년 9월 소천하였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무지내교회 및 수원교회, 공주교회의 개척자인 김동현(1869~1928) 전도사는 1869년 이곳 시흥시 무지내동에 출생하여 1898년 배재학당 재학시절 소래읍 무지리 자택 사랑방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무지내교회를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1902년 권사가 되면서 무지내교회는 그의 지도 아래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습니다. 교회 내에 수원지방 최초로 남녀공학인 매일 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쓰고 선교사의 명에 의해 1902년 수원교회 개척을 위해 땅을 샀다가 당국에 구속되기도 하였습니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석방 된 후 다시 선교사의 명에 의해 1903년 공주로 내려가 공주선교의 터를 닦기도 했습니다. 1908년 고향의 교회로 돌아온 후 1920년 사촌 김동일 목사와 함께 무지내에 흥업 강습소를 세워 교육선교를 하였습니다. 김동현 전도사는 1928년 당시 고양군 용강면 이현리(현 서울 아현동) 에서 소천하였습니다.
무지내교회는 기독교 대한감리회 중부연회 시흥북지방 소속으로 일제강점기에 설립되어 경기도 시흥과 안산·수원 지역, 충청남도 공주 지역으로 교리를 전파한 교회이다.
1901년 5월 아담한 예배당을 신축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봉헌 이듬해인 1902년 6월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가 무지내교회 예배에서 설교하기 위해 가던 중 경부선 철도 둑과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일본인 노무자들과 시비가 붙어 봉변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난데없는 봉변으로 심한 부상을 당한 아펜젤러는 서울로 되돌아갔다.
아펜젤러는 이 날 사건의 증인으로 법정에 출두하게 되어 목포에서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던 성서 번역자 회의 참석도 어려워졌다. 다행히 다른 날에 출발하였지만 타고 있던 배가 다른 선박과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나 먼 이국 땅 깊은 바닷속에서 영면하게 된다.
2002년 6월 10일 아펜젤러의 유족들은 이러한 인연으로 무지내교회를 방문해 무지내교회를 아펜젤라 순직 기념교회(The Memorial Church of Henry G. Appenzeller)로 선정하는 선포식을 진행하였다.
1898년 12월 28일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에 ‘무지내교회에서 남녀 40여 명이 예배하고 남자 3명, 여자 2명, 어린이 10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입교 4명, 학습인 5명’이라는 기록이 있어 1898년 인천부 전반면 칠리 능내동[지금의 시흥시 무지내동]에 창립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후 1901년 8월 6평[약 20㎡]의 예배당을 신축하였으며, 1902년 5월 또 다른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당시 무지내교회는 교세가 매우 커서 그 지역뿐만 아니라 주변 6개 마을의 중심지였으며 등록 교인은 100여 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마을이 전소되고 예배당이 기울어 어려움을 겪다가, 1952년 5월 선교사 스웨어러(W. C. Swearer)의 모국 교회 주일학교와 여선교회에서 모금한 140달러를 지원받아 1952년 11월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1992년 6월 20일 누전으로 교회가 또다시 전소되어 비닐하우스에 보온 덮개를 설치한 18평[약 60㎡]의 임시 건물에서 예배를 드렸다.
1997년 8월 31일 180평[약 600㎡]의 예배당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교회 명칭은 본래 지역명에 따라 무지내교회, 뭇지내교회, 무지리교회 등으로 불리던 것을 1967년 4월 김의섭(金義燮) 목사가 부임하며 시온교회로 개칭하였으나, 2002년 3월 10일 교회 임원회에서 전체 회원 찬성 결의에 의하여 무지내교회로 명칭을 복구하였다.
무지내교회는 설립과 동시에 상대적으로 교육 소외 지역에 속했던 무지내동 지역민의 교육에 힘써 왔다. 1901년 경기도 최초로 현대식 사립 학교인 무지리여학교를 설립하였고, 1901년 5월 메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의 원조로 어린이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무지리여학교가 「사립학교령」에 의해 1914년 폐교된 이후 1920년 김동일(金東一) 전도사가 흥업강습소를 설립하여 초등학교 1~3학년 과정을 가르치는 등 그 전통을 이어나가고자 하였다.
흥업강습소를 졸업한 학생은 다른 학교 4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1948년 8월 30일 흥업강습소는 소성고등공민학교로 인가를 받아 중등 교육기관으로 승격하였다. 이후 여학생들은 무지내교회에서, 남학생들은 소성고등공민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6.25전쟁으로 학교 건물이 전소된 후 소성고등공민학교 자리를 1969년 양만영(楊萬英)이 인수하였다가, 1976년 12월 15일 한상호가 재인수하여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1977년 6월 25일 한인고등기술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았으며, 2009년 3월 5일 경기자동차과학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한편 소성고등공민학교는 1979년 5월 1일 경기도교육위원회 제200차 본회의 의결에 따라 설립 34년 만인 1982년 2월 28일 폐교되었다.
2017년 현재 무지내교회의 등록 교인은 80여 명 정도이다. 매화교회, 과림교회, 물왕교회 등을 지교회로 두고 있다. -디지털백과 발췌
[컷팅식]
[제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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