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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왕마을이야기/정왕본동-YOU

까도까도 양파같은 매력, 박선美!

까도까도 양파같은 매력, 박선!

5년전, 은행동 목화마을에 살던 한 주민이 말했다. “이사온지 30년이니 우리에겐 제2의 고향이지만, 우리 자식들은 시흥이 고향이거든요.”

 

시흥이 고향이 된 이주세대의 후손. 고향은 신천동. 정확하게는 시흥군 소래읍 신천리. 현재는 정왕2동 주민. 신천동에서 20. 정왕동에서 20. 방탄소년단 덕후. 체육인. 마을활동가. 회색빛 짧은머리 여인. 초등 두아이의 엄마. 그리고 박선미!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전혀 개입될 여지가 없어보이는 연결고리들은 끝도 모를 싱크홀처럼 깊이깊이 들어가게된다. 그 어울리지않는 조합들로 인해.

 

 

강원도출신의 친정엄마와 부산출신의 친정아버지가 서울에서 만났다는데 제정구의원의 이름이 튀어나온다. 제정구의원과의 인연이 시작되면서 터를 잡게 된 보금자리. 건축이 특이한 목화마을에서도 잠시 살았다고 한다. 놀이터를 끼고 있는, 가운데 나동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부모세대는 이주주민이지만, 그 자녀는 시흥에서 태어나 고향이 되었고, 그 다음 세대도 시흥이 고향이 되었다. 20년간 자란 신천이라는 동네의 기억은 근처의 바다로 잠시 머물렀다.

 

포동 뒤쪽으로 모두 바다였던 곳에서 물놀이를 했다는 걸 보면 꽤나 활발한 꼬맹이였나보다. 염전을 만들기 위해 막아둔 바다의 물을 퍼내기 전에는 물 수위가 낮아진다. 그 틈을 시에서는 더운 여름, 물놀이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확장공사라는게 들어가면서 모래를 퍼대니 구덩이가 생겨 빠져죽을 뻔한 경험도 주었다.

 

어릴 때 엄마 손 잡고 가던 재래시장은 꼬맹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을 터. 선미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일시장, 삼미시장. 정왕시장을 두루 다니면서 맛있는 것도 사먹고 구경도 했지만, 지금은 그때만큼의 정취가 없어 아쉽다.

 

어릴적 삼미시장은 건물 네, 다섯개 사이에 있는 길에 좌판 깔아놓고 만들어진 시장이었다. 도일시장은 더 작았다. 그냥 동네에 모여있는 느낌이었다. 정왕시장은 건물 안에 있는거라 시장의 느낌은 나지 않았다. 예전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아 주거로 생활 터전을 잡은 경우는 없었지만, 외국인 거주 인구가 많아지면서 한국인 시장으로 시작한 정왕시장이 점차 중국인 시장으로 바뀌어갔다. 속된 표현의 시장으로도 불리우지만 아시아문화거리라고 불리우니 좋다.

 

정취를 생각하면 그때가 좋지만 시흥의 발전을 생각하면 지금의 변화를 받아들여야겠지요.”

 

40년 발전사를 동으로 보자면 은행동이 제일 발전했다고 말한다.(여기에서의 40년이란 박선미씨의 나이만큼이다.) 대야동은 개발 중이고, 매화동은 발전해야 한다고 한다. 시청의 이전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학교도 소래초··고 하나씩 있었다. 소래초··고를 다닌 선미씨는 학교에서도 평범한 학생은 아니었나보다. 역시 체육인이었다고 고백한다. 소래중에는 시에서 지원하는 농악부가 있었다. 시범학교였다. 육상을 하다 다쳐서 그만두는 바람에 농악대회에 나간 1세대다. 2에 시작해서 2년간 활동하는 동안 경기도대회 신인상, 전국대회 우승을 한 전력을 남겼다.

 

작은자리 남사당패의 교육으로 대회 한번 나갈 때마다 70여명 정도의 단위가 움직일 정도였으니 대단하긴 했나보다.

 

시흥시 대표로 나가서 우승한 것도 있지만, 첫 대회인데다 성인부대회에서 중등팀이 받은 신인상이어서 더 대단했죠.” 중학생 선미는 상모돌리기 담당이었다. 상모를 돌리는 시범을 보이는데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나이탓인가?) 육상에서 농악으로 신명나는 중학시절을 보내고 소래고로 입학하면서는 시범학교로 체대입시가 처음 생겨 그 혜택을 본 1세대가 되었다. 마주 본 중.고에서 다양한 혜택을 보며 열정적인 학창시절을 보냈던 선미씨의 모습이 가히 상상이 된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넘어간 정왕동이란 마을에서 사회생활을 하고 결혼을 했다. 아이들 교육에만 전념하겠다는 다짐은 10년의 경력단절이란 이력을 남겼다. 선미씨는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체육인과는 다른 이미지를 말하고 있다. 그림 이야기하다 굿즈 이야기가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아이돌 덕후라는 말을 내뱉는다. 누구냐고 재차 물으니... ‘방탄소년단이란다. 우연한 순간의 설레임이 덕후의 길로 가게 할 줄이야...

 

 

이 사람 뭐지? 이런 맥락없는 전개는? 까도까도 전혀 상상도 못할 이력들을 쏟아낸다.

 

방탄소년단 덕후가 된 계기는 우연한 기회에서 받은 자극 때문이라고 한다. 둘째를 막 낳았을 때다. 지인이 해당 된 사고, 세월호... 산후조리하면서 몹시도 우울했었다. 그때 방탄소년단 노래가 들려왔다. 세월호 1주년 다큐였다. 엔딩노래로 방탄소년단 노래가 나왔다. 제목은 봄날이다. 뮤직비디오에 세월호를 상징하는 영상이 나오고 가사가 보였다. “?” 하는 반응은 우울감을 흐릿하게 하고 노래를 다시 찾아보게 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데리러갈게라는 가사가 감성선을 자극했던 것이다. 말그대로 덕질을 시작한건 2015년부터다.

 

방탄소년단을 향한 팬심은 또 다른 세계로 빠져들게 했다. ‘카페에서 커뮤니티 봉사활동을 하면서 팀장까지 맡았다. 그냥 좋다... 수준의 팬은 아닌 듯, 의미를 담은 봉사활동을 해나갔다. 가장 중요했던 봉사활동 중 하나는 보육원 퇴소를 앞둔 청소년들을 위해 길을 터주는 일이었다. 보육원에서 자란 청소년들은 성년이 되면 얼마의 지정된 자립지원금을 받고 나가야 한다. 관련된 다큐를 보면서 바로 회의 소집에 들어갔다. 방향 설정을 하고 보건복지부와 연계하여 범위를 넓혔다. 바자회를 통한 지원 활동을 진행했다. 물론 팬클럽 이름으로 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않은 채 사회에 내던져지다시피하는 청소년들의 앞으로 살 걱정에 시작한 봉사활동은 지금까지 약 50여명의 청소년들이 자리잡을 수 있게 길을 터주었다. 물론 정기적 후원과 비정규적 후원도 있다.

 

그들에게 우리는 이모단이라고 불리워요.”

 

바람개비멘토링이라 불리우는 사업이 있다. 보건복지부에서 지원한다. 퇴소한 아이들이 서포터즈로 모여서 다시 보육원에 봉사하러 가는 모임이다. 받은 고마움을 다시 돌려주는 기특한 아이들이다. 선한 영향력이 발휘되면서 몸은 힘들지만 모두가 보람차하고 또 뿌듯해했다. 그 사업은 끝났지만 지속적으로 아이들과 연계해서 생활키트를 실천하고 있다. 한번 손을 댔기에 끝까지 가야 한다는 각오다. 그리고 굿즈를 만들어 시흥의 한 카페에 전시, 판매하고 있다. 직접 그린 그림, 물품등이 있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연필화를 배우는 것도 굿즈를 만들기 위한 일원이다.

 

 

박선미마을활동가! 너무도 익숙한 평범한 이름 착할, 아름다울! 할아버지가 지어주었다는 이름 그대로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있는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지 않은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선미씨의 인생 40년 행보에서 우연한 기회는 또 다른 길을 안내했다. ‘책먹는여우들과의 인연이다. 책먹는여우들 이영희강사로부터 열린 길은 ()더불어함께에서 마을에 정착할 조짐을 보였다. 이영희강사와는 자녀들이 어린이집에 다닐 때부터 인연이 되어 온 사이다. 학부모로 만나기도 했지만 같은 아파트에 사는 주민이기도 하다. 마을활동가로서 어쩌면 예고된 운명같은 인연...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문서 관련 자격증과 외국어 관련 자격증을 준비한 선미씨에게 펼쳐질 앞으로의 40년은 어떨까...?

 

 

()더불어함께에서 박선미씨의 역할은 문서 및 네트워크등 전반적인 업무지원이다. 네트워크 사업은 여러 개가 혼재되어있다. 단순히 앉아서 하는 업무가 아니다보니 그나마 적성에 어긋나지 않는다. ‘자전거교실에서는 안전 보조 및 관리를 맡고 있다. 2021년도에는 자전거교실이 초급으로 모집되면서 기초부터 탄탄한 교육을 받고 있다. 초등 저학년 8명은 매주 목요일 오후 3시에 정왕본동에 있는 맞손동네관리소에 모인다. 이준우강사의 특이한 교육법을 보면서 저렇게 가르칠 수도 있구나하는 감탄사를 연발하는 중이다. 자전거를 처음 타보는 아이들이 수업 두 번만에 페달을 밟게 하는 걸 보니 탁월한 능력이 있긴 한 모양이다.

 

대표님이 저만 보면 자격증 따서 나가라 해요. 뭐든지 배울 수 있는거는 다 배우고 여기가 종착역이 되지는 말아라, 거쳐가라 하시죠.” ‘더불어함께에서는 어린 축에 끼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나이를 잊게하는 마을... 마을을 위한 일에는 나이에 제한이 없다. 그저 마을을 위한 미래가 있을 뿐이다. 아직 더 배우고 알아야할 것들이 많은 지금, 가치를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