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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왕마을이야기/정왕본동-YOU

또 다시 스물여섯

독백..

나 자신을 칭찬할 줄 모르나? 스스로에게 관대할 줄도 아낄 줄도 모르는 삶을 살았던 이십대 시절. 학창시절 또한 돌이켜보면 소위 건방지고 안하무인인 아이였다. 예의가 없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막 대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난 뭐든 잘했으니까... 그럼에도 사람들이 날 좋아해주었으니까...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당연히 여겼던 것들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착해졌나?

 

아시아스쿨에 야무진 청년활동가 채희영선생이 들어왔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검고 긴 생머리, 수수한 티셔츠 차림에 반바지를 입은 모습에서 삼십중반의 나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이를 잊은 그대에게경기꿈의학교 거점센터 아시아스쿨에서 청소년학교를 맡긴 것은 인재 양성의 큰그림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흐름일까...?

 

돌이켜보면 모든 것은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지나가고 있었던 것 같아요.”

흐르는 과정에서 꽃길도 걸어봤고 좌절도 해봤고 번뇌도 해봤으며 단단해져가는 심장도 느낄 수 있었다.

 

학구열이 높았던 부모님 덕에 편하게 학교를 다니면서 건방져도 좋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채희영. 그래서 갖게 된 그의 이력은 법대 출신 사회복지사다.

 

전혀 다른 분야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청년이 돌고돌아 정왕본동 아시아스쿨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불과 3개월여(인터뷰당시). 그의 이야기가 시흥의 청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단 하나의 꼭지라도 느끼는 바가 생긴다면 그것으로 좋겠다는 마음에서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서른네살 희영씨의 미니다큐, 또 다시 스물여섯!

 

1

 

희영이의 학창시절

학교에 다니니 공부를 했다. 공부를 하니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안산에서 5위 안에 드는 고등학교에도 무난히 들어갔다. 학창시절의 여학생 희영은 거칠 것이 없었다. 충분히 건방졌고 싸가지없고 안하무인이었다. 예의가 없지 않았으니 상당히 잘난 맛에 살았다. 대학입시를 코앞에 두어도 어떤 목표를 세우지 않았다. 아니 세울 필요가 없었다. 목표가 없으니 욕심부릴 것도 없었다. 받아든 성적으로 갈 수 있는 곳, 흥미가 있는 곳에 진학을 하면 되는거였다. 원하던 것은 역사였고 학교에서 케어받는 소수의 상위권축에도 들어있었다. 역사가 좋은 이유는 사람들의 이야기라서인데 내가 사는 삶이 아닌 다른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역사 속에서 알아가는 것이 좋았다. 길은 곧게 열려있었다. 너무도 당연하게...

 

그러나 대학은 달랐다. 무난하리라 생각했던 대학 진학에서 처음 좌절이란 것을 맛보았다. 성적에 맞춘 학교, 성적에 맞춘 과를 선택해야했다. 진학에 도움을 준 선생님의 조언도 한몫했다. ‘법도 사람 사는 이야기다. 다투는 과정 속에 법이 있는거 아니겠냐밀리 듯 들어간 학교는 단지 타이틀만 주었고, 입학과 동시에 두 번째 좌절을 겪어야했다.

 

왜그랬을까...

갑작스럽게 주어진 자율적 공부 방식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뒤처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대학에 대한 환타지가 있었기에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떨어지리라 생각해본적도 없던 대학이었기에 더 많이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이라는 곳에 환타지가 있었고 기대도 했다. 여대생 희영에게 학교는, ‘지성인이 지성을 가지고 교류를 하는그런 캠퍼스였다. 아니 학교는 준비가 되어있었는데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이 더 맞으려나. 어쨌든 실망이 컸다.

 

레게머리에 진한 메이크업, 화려한 차림... 무언가에 꽂히면 그 스타일로 끝까지 가는 성향의 소유자였던 대학생 희영은 학교에서 눈에 띄는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화도 많았다. 아니다 싶은 것에 내는 큰 목소리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일쑤였다. 유연한 대처 따위도 필요없었다. 꼰대질하는 선배들을 이해할 수 없으니 당연히 미운털이 박혔다. 그러던 차에 뒤처지는

자신을 보고 의욕이 사라져 버렸다. 의욕이 없으니 성적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꿈을 가지고 온 친구들과 비교하며 힘들어하는 자신이 한없이 못나보였다. ‘나는 과연 꿈을 가지고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자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취업을 준비하면서 더욱 깊은 좌절 속으로 떨어졌다. 그때부터 사회인 희영씨는 번뇌하는 인간의 삶을 살았다.

 

나는 세상에서 원하는 인재가 아니었다.

나는 세상에서 원하는 인재가 아니었어요.”

대학도 그렇고 취업도 원하는대로 되지 않았다. ‘이 정도의 스펙이면 취업이 쉽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쉬울거라는 취업의 문은 번번이 열리지 않았다. 대기업은 서류에서 탈락을 하고, 공기업에서 면접을 보면 들러리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면서 많이 위축되었다. 제대로 된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소위 말하는 안전한 곳, 적당한 곳을 찾으니 잘 될 리 없었다. 결국 원하는 요건이 충족되지않은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왜 안되지?’ 하는 의문을 품은채로. 그래도 거만함은 버리지 못했다. 중소기업에 왔다는 것이 부끄럽고, 창피하고, 후배들한테 볼 낯도 없었다. 점점 주변의 기대와 칭찬 일색이 달라져갔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게 체감이 되더라고요.”

 

이십대 중반 나이에 들어간 회사에서 처음 3년은 좌절한 채로 다녔다. 무기력함, 볼 것 없는 비전, 쳇바퀴 돌 듯 반복된 일상... 그러나 크게 사고 한번 치고 나서는 아차 싶었던지 조금은 다져진 회사생활을 하게 되었다. 좋은 머리 믿고 안일한 근무태도로 친 대형사고이기에 그것이 계기가 되어 마음을 다잡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목표를 세웠다. ‘성실하게 일해보자, 애정을 가지고 해보자그 마음은 4년을 더 다니게 했고 따라서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게 했다. 담당 업무가 인사노무 관련한거라 지나다 직원들이 문의를 하면 막힘없이 대답해 줄 정도의 지경에 이를 정도로 베테랑이 되어갔다. 목표를 정하니 최선을 다하게 되고 그만두는 날까지 나름 근무를 잘했다. 하지만 사람이 안보이고 업무로만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직의 마음이 커져갔다. 그리고 올 2월 퇴사를 했다.

 

자신을 돌아보며...

퇴사를 결심하게 되면서 스스로 옥죄던 마음을 내려놓고 멀리서 보았다. 그랬더니 스스로가 안쓰러워 보였다. 열심히 해왔다고는 하지만 또 다른 후회가 밀려왔다.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왜 안했을까?’ 하는 후회와 타협이 없던 무모함. 그리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들을 겪으면서 치러야했던 좌절감. 너그럽게 이해하면 그 사람의 상황을 볼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했던 것들.

 

누군가는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가고, 열심히 준비해서 취업을 했을텐데 열심히 하지 않은 자신을 탓하기보다 본인이 이루지 못한 것을 혼자 무기력하다, 초라하다 그런 생각만을 안고 살았으니, 그 귀한 이십대의 시간들이 안타까울만도 하다. 대학 입학부터 퇴사를 한 2월까지는 온전히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막연하지만 또 다른 시작

스스로 옭아맨 것들을 내려놓고 다른 것을 해보자 했던 건 중소기업 재직 당시였다. 정확하게는 작년 중순 경부터다. 그렇다고 원대한 꿈을 가지고 시작한 것은 아니다. 스스로에 대한 적성은 없었지만 나름 뭔가를 위해 노력이란 걸 해보았다. 회사는 안정적이고 급여도 좋고 시간도 좋은 조건이었다. 결혼을 했다면 안정적인 삶을 위해 그대로 다녀야 했겠지만 결혼도 하지않았고 아직 젊기에 또 다른 길을 가도 될 듯 싶었다. 물론 이길이 맞나?’ 하는 고민도 없지않았지만 변화가 필요한 시기를 맞이했던 것 같다.

 

사회복지 한번 해볼래?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엄마의 툭 던진 말이 시작이었다. 언젠간 써먹을데가 있지않겠느냐는 정도의 말은 6개월가량 계속됐다. 그럴 때마다 싫다고 했다. 사회복지라는게 뭘 하는지도 모르겠고 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우연히 아동심리 관련한 영상을 보게 되었다. 직업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한번 들어나 볼까하는 막연한 시청이었다. 아동심리학 강의 영상에는 사례 관련 이야기가 들어있었다. 각기 다른 가정환경에서 자란 아이들과 부모들의 직업 사례들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면서 처음에는 관심없이 보다,말다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몸이 영상 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느꼈다. 사람들이 수많은 대상들에게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주면서 뭔가 형성 되어가는 것들이 흥미로웠다. 흔히 말하는 아동심리가 아닌 다른 관점에서 풀어나가는 것들이 재미를 느끼게 해준 것 같다.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친구들도 떠올려지게 되었다.

 

친구들 중에 아이를 낳아 유치원에 보내는 친구들이 있다. 영상 속 사례들을 보면서 친구들은 어느 쪽일까?를 생각해보았다. 그러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사회복지라는 학문은 적성에 맞았다.

 

그동안 내가 만난 사람들이 내 눈에 어떻게 비쳐지고 또 그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궁금했어요. 아동심리학인데도 아이만 공감되는게 아니고 아동에게서 오는 영향들이 성인한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들이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어요.” 사회복지를 공부하면서 망설이지않고 아동을 선택한 이유다. 그 새로운 길에 가족이 있었다.

 

 

띠동갑 동생을 향한 질투

동생이랑 띠동갑이예요

동생이 태어날 때의 기쁨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로 표현되었다. 주변에 형제자매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었나보다. 놀이기구 탈 때도, 놀이를 할 때도 언제나 혼자였는데 같이 할 수 있게 되어 좋다 생각했다. 아빠 직장 때문에 초등학교만 6군데를 옮겨다녀야 했던 어린 시절, 동생은 외로운 초등 희영에게 선물같은 존재였다. 나이차가 있다보니 더욱 애틋하고 귀한 동생이다.

 

동생이 막 걷기 시작할 때, 유치원 입학할 때, 학예회에서, 초등학교 들어갈 때, 중학교 교복사러 갈 때, 때때마다 눈물 바람이었다. 예쁘고 기특하고 좋아서. 교복을 입었을 때는 다 컸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동생을 질투하기 시작한 건 낙오된 사람이라는 좌절감이 극에 달해있을 때였다. 부족함없이 모든 걸 지원해준 부모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도 있지만, 판사가 된 친구들, 대기업에 취직한 친구들과 비교하니 상대적으로 무기력함이 커진 상태에서도 동생은 바르게 잘 크고 있었다. 이십대 중반 시절, 모든 관심과 자랑이 동생에게 집중되면 그것이 사회 초년생 희영씨에게는 박혔다. ‘분명 나의 학창시절도 화려하고 빛났었는데...’ 하지만 지나간 과거에 볼과했다. 동생을 예뻐하는 마음과 별개의 마음이 공존하고 있었기에 티를 내지 못하고 응어리만 쌓여갔다. 많은 나이 차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못난 감정만 만들어냈다.

 

왜 하필 나이차가 이렇게 많이 날까? 형제끼리 고민도 나누고 누가 칭찬하면 질투도 나지 않아야 하는데..” 많은 나이차는 여느 형제처럼의 유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동생은 동생대로 불만이나 고민이 있었을텐데.. 하지만 동생은 꽤 의젓했다. 부모님이 동생에게 하는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철이 없었다.

 

어쩌면 동생을 핑계삼아 도피처로 삼았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열심히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스스로 만들어 낸 스스로의 도피처... ‘난 그럴만했어라는. 띠동갑 동생에게 질투한게 미안했다.

 

이제 군대도 가고 성인이 되어 듬직한 남자가 되었다. 좌절의 한 몫이었던 동생은 이젠 든든한 배경이 되었다. 군복무 중에도 소소한 것에 감동을 줄줄 아는 동생... 지금 너무나 보고 싶다.

 

감사한 부모님

새로운 길을 가게 되는 데에는 엄마의 영향이 크긴 했다. 사회복지 관련 일을 하고 있던 엄마는 딸에게 어울리는 일을 알아차렸던 걸까? 대학시절 휴학했던 2년간 학원강사로 일한 적이 있다. 그때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아이들에게서 받은 에너지에 좋은 기운을 받아서일까? 그것이 좋아보였던지 마음에 담아두셨던 듯 하다.

 

사실 엄마도 딸이 학교에 다닐 때는 욕심이 있었을거다. 여느 엄마들처럼의 평범한 욕심... 주위에서 공부를 잘한다잘한다하니 욕심을 내볼만하다는 생각을 했을테니 힘든 대학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선뜻 다른 것을 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물론 희영씨의 추측이다.

 

엄마에게서 공감을 얻어낸건 회사에 다닌지 5년쯤 지나서다. 미련스러울만치 한 직장을 계속다니니 진득한 그 하나만으로도 이해를 하고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엄마, 아빠는 정말 좋은 분들이다. 늘 자식들의 말을 들어주고 도와주었다. 부모님은 자식들을 위해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지원해줄 준비가 되어있었는데 그때는 왜 몰랐을까. 그저 저 혼자 잘나서 컸다 생각하고 자신밖에 몰랐으니 부모님의 큰 품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저 삐딱함으로 자신을 옭아매기만하고 갈등이 있을 때 알아주기만 바랐던 못난이였다. 이제 엄마, 아빠가 안쓰러워지기 시작 할 정도로 나이를 먹었다. 그렇게 희영씨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옆에서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사람이 있다는건 진정 행복이다. 친구들끼리의 소통도 중요하지만 정말 소중한 것은 부모라는 것을 시흥의 청소년과 방황하는 청년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어른들의 말씀은 모두 현명하고 지혜로우니 잔소리마저 행복한 마음으로...

 

그리고 물질적인 것이든 마음적인 것이든 부모님의 아낌없는 지원과 말없이 묵묵히 지켜봐주심에 인터뷰를 빌어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다.

 

 

2

 

경기꿈의학교거점센터 아시아스쿨과의 인연

실습지가 푸른지역아동센터였다. 실습지였지만, 푸른지역아동센터에서는 많은 기회를 주었다. 아이들을 직접 만나 케어하게 해주고 생각하고 있는 의견등을 물어봐 주었다. 제시한 의견을 수용해주고 값지게 해주어 점점 마음이 깊어져갔다.

 

푸른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같이 걸어다니면서 마을이라는 것에 눈을 뜨게 되었다. 마을의 환경은 꽤나 심각했다. 마을과 가정에서 겪는 아이들의 결핍이 어떻게 성장이 될지 보였다.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 직업이 사회복지쪽이라면 진짜 직업으로 가져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을에서 보았던 것들이 복지사의 길로 들어선 희영씨에게 숙제로 쌓여갔다.

 

그러던 어느날, 직원을 채용한다는 전화가 왔다. 그것이 경기꿈의학교 거점센터 아시아스쿨이다.

 

아시아스쿨에서 청소년학교를 담당하게 되었다. 코로나19 때문에 수업을 할 수 없는 상태지만 남는 시간만큼 여유있게 배울 수 있는 행정과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놀랄 일도 많아졌다. 마을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많음에 놀랐고 다양한 직업이 존재함에도 놀랐다. ‘마을활동가라는 존재는 신선함이었다. 작은 동네, 좁은 골목에 아시아스쿨이라는 시설이 있는 것 또한 신선했다. 어쩜 그렇게 몰랐을까... 마을활동가들이 단체로 움직이며 마을을 위해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지나다보면 마을활동가들의 움직임이 보인다.

 

마을풍경

걸을 때 오직 앞만 보고 걷는 내가 느긋하게 걸으면서 마을풍경을 봐요

마을 풍경 안에 사람들이 있었다. 소위 마을활동가라 불리우는 사람들은 보수가 있는 사람들도 있고 봉사만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보수를 받든 봉사를 하든 마을을 위해 헌신하는 마음은 같다. 다루는 프로그램도 놀라울 정도로 많았다. 기관도 많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몰랐던 세상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희영씨는 이런 기관, 이런 프로그램, 이런 사람들이 마을을 위해 존재하고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싶어했다. 많이 알렸음에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고하니 안타까워했다. 어떻게 하면 알릴 수 있을까? 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아는 사회가 오긴 할까?

 

나는 변하고 있는 중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람 보는 눈을 기르고 생각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자신을 뒤돌아 보게 되고 사람들 이야기를 속으로 그려보면서 공부도 병행하니 다시 로 돌아왔다. ‘나란 사람이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데...’

 

소위 잘 나가는 학창시절을 보내고 성인이 되어 스스로 지치고 무기력한 시간들 속에서 다치고 또 다치며 그렇게 시야는 변해있었다.

 

이제 다시 돌아왔다.

아직 근무한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처음에 서먹했던 아이들이 점점 다가와 주고 환경에 익숙해져감을 느끼면서 친밀감을 다져가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활발한 수업이 이뤄지고 있지는 않지만 모든게 정상화될 때의 분위기를 상상해본다. 그때는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그리고 새로운 프로그램 개발 참여에도 기대를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지속적인 현상이 될 코로나19로 언제까지 수업을 중단할 수 없으니 코로나가 와도 무리가 없는 프로그램 개발에 고민하고 있다. 새로운 사람이 오면 새로운 생각이 더해질거라는 믿음은 나누다보면 좋은 아이디어로 표출될 거라 믿는다. 그 새로운 생각으로 실현 가능한 프로그램이 개발된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다. 그것이 효과를 거둘 때 비로소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어리지만 어리지않은 나이, 젊지만 젊지 않은 나이 34살에 희영씨는 아시아스쿨 사무실에서 아동·청소년 관련 일을 하고 있다. 같이 일하는 선생님이 희영씨보다 7살 어리지만, 경력에서 많은 차이가 나는만큼 더욱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시간이 해결할 경력이지만, 원하는 만큼의 만족된 생활로 직업이 유지된다면 좀 더 나이에 맞는 욕심과 맞춰갈 수 있는 길을 찾게 되길 바라고 있다.

 

또 다시 스물여섯!

새로운 일이 시작되었으니 우선 적응하는 것이 당장 주어진 숙제다. 그리고 자신의 변화를 위한 노력도 진행 중이다. ‘저 사람도 끊임없이 변하는데 나만 제자리에 있을 수 만은 없다는 다짐도 노력 안에 들어있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26살 때의 그때로 돌아가는 희영씨는 서른넷이지만 스물여섯이다.

 

그리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정도가 아닌 많은 걸 보고 많은 활동을 통해 배우며 부족한 점들을 해결할 방법이 떠올려지면 그때는 사회복지사로서의 이름에 자신을 가질 수 있을까?

 

이제는 친구, 가족,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고 영향을 주는 섞이는 사람으로 단련이 되고 싶다.

 

나를 인정하기까지 1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지만 나에게 어떤 자질이 있는지 일단 공부하며 변화하고 싶어요

 

시흥시민이 된지 6.

드라이브 삼아 나들이 가던 부모님의 한말씀, “거기 좋더라이 한마디에 시흥시민이 되었던 희영씨는 시흥에서 다시 시작하는 청년 채희영이다.

 

 

 

 

* 이 사업은 시흥아동·청소년지원네트워크 주관·주최, ()더불어 함께가 기획하고 삼성꿈장학재단에서 후원합니다. '당신을 만나고싶습니다 YOU' 사람을 지역의 자원으로 발굴, 연계하여 지역력을 높이는 일을 목적으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