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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왕마을이야기/정왕본동-YOU

곽미아의 성장기


어린 곽미아는 패션디자이너를 꿈꿨다. 그 다음 꿈은 군인이었고, 경찰로 또 한차례 바뀌었다. 자주 바뀌는 꿈은 그만큼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상상력도 풍부해서였을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에 부산에서 학교를 다니던 기억은 살짝 아픔으로 남아있다. 전라도 사투리가 베어있는 말투로 왕따를 당했기 때문이다. 그럴때마다 외로웠던 어린 곽미아는 든든한 아버지의 품이 그리웠다. 1년이면 한달 정도만 같이 지내는 것이 전부였던 아버지의 직업은 선원이었다. 외양선을 타고 세계를 도는 아버지의 빈자리. 위축된 어린 곽미아는 뭉쳐서 다니는 여자아이들 속에 낄 수가 없어 남자아이들과 더 잘 놀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어머니마저 병석에 누워 온전한 여고시절을 보낼 수 없었다. 가장 꽃다운 시절, 여고생 곽미아는 뭔가를 하고 싶다는 걸 잊어버린 채 살아야했다. 여고시절은 매일 아침마다 병석에 계신 엄마에게 식사를 챙겨드리며 오가는 학교생활로 늘 침울하기만 했다. 뭔가를 잘 해내야겠다는 생각도, 딱히 뭘 해야 할 마음도 없었던 고등학교 3년이었다. 위로 오빠 한 명이 있고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있는 딸, 곽미아는 여자라서 해야 할 일이 더 많고 희생까지 해야했다.

 

집안 형편이 좋지않은 가운데 3살 터울의 오빠가 3수를 하면서 고민할 것도 없이 희생을 했다. 형제 중에 누군가 희생을 해야 한다면 중간에 낀 딸이어야 한다는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속상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 그런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기에 청소년 시기에 무기력하고 꿈을 잃어가는 친구들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그것은성인이 된 곽미아씨에게 대학에서 청소년 관련 과목을 전공하며 청소년들을 보듬어주는 길에 들어서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 꿈은 잠시 가슴 속에 간직한 채로 결혼을 하면서 접어두어야 했고, 신접살림을 차리던 서울에서 IMF를 직격탄으로 맞아 지방으로, 부천으로, 정왕으로, 다시 지방에서 정왕으로 오고가는 이사 끝에 정왕동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첫 아이 임신한 상태에서 주말부부를 해야 했던 시절, IMF로 회사의 파산도 겪어야했지만 성실한 가장의 노력은 정왕에 정착해 살면서 두 아이를 대학에 보내고 여유로운 삶을 안겨주었다.

 

여유로운 삶은, 살아있는 도시가 아니었던 정왕을 뜨자하는 마음먹음에서 정착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생각의 달리함에서 왔다. 열심히 살다보니 아이들이 정왕동에서 큰 것이다. “아이들 졸업을 시키면서 느낀 것이 내가 고향을 그리워하듯이 우리 아이들이 고향을 그리워할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하는데 시흥이 그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으로 전환 된 것이다. 처음 정왕동에 입성했을 때 좋지 않았던 여러 환경들을 그저 좋지 않은 환경만을 탓할 것이 아니라 환경을 바꿔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으로 바뀐 것이다. 삶의 여유로움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오랜 꿈이었던 청소년을 위한 일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찾아가는 봉사에서 마을강사가 되기까지

돌봄센터, 지역아동센터, 초등학교에서 전래놀이 강사로 거듭난 곽미아선생. 2019년 처음 초등학교에서 창의체험학교 수업을 들어갔다. 돌봄센터에서는 놀이지도 봉사 나갔다가 수업을 하게 된 케이스다. 찾아가는 봉사의 길을 택한 곽미아씨. 그녀가 온전히 마을로 나온 것은 꽉 찬 1년 전이다. 그 전, 우연한 기회에 주민자치 프로그램으로 또 학교 방과후지도로 3년여간 주산과 암산을 가르치기도 했다. 두 자녀에게 학습지도를 하면서 지인들이 하나,둘씩 아이들을 맡겨와 공부방도 운영했다. 그러기를 6년여. 공부방 선생님은 공부방을 잠시 접고 회사원이 되어 4년간 관리자로 근무하는 외도를 하게 된다. 오랜 꿈은 회사를 하면서도 여전히 마음 속에 남아 집중할 수 없었고 공부에 대한 열망은 날이 갈수록 더해져만 갔다.

 

회사를 다니는 내내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활동을 구상하며 언젠가는이라는 목표만 세운 채 또 다른 외도를 하게 되었다. 본인의 영업적인 능력을 보고 싶어 부동산 관련 일에 도전 한 것이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 전에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지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보고자 한 것이다. 1년 정도를 하면서 스스로도 그런 능력은 인정될만하다 하는 결과를 얻어냈다. 그러나 부동산 일이란 것이 하면 할수록 사람들에게 진실로, 진심으로, 다가갈 수가 없음을 깨닫게 되면서 청소년들에게 다가가기엔 감정에 오염이 생길 것 같아 중단했다. 그렇게 돌고 돌아 다시 맨 처음 마음 먹었던 '공부'를 했다. 청소년 쪽의 일을 하려면 쉽게 접근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학교폭력지도, 인성지도 등등이 있을텐데 정왕동의 특수성 때문에 쉽지 않은 공부의 길이지만 거침없이 걸어나갔다.

 

정왕동은 생산직 직종을 갖고 있는 인구가 많다. 3분의 2가 한부모가정이고 이혼가정이 절반이며 그 중에는 사별도 있고, 아이들 키우면서 접했던 초등학교에서는 조손가정과 특히 다문화가정이 많았다. 이 지역에서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것과 아이들에게 조금 더 마음으로 다가가고 싶은 마음에 인성교육과 학교폭력 지도자 과정을 공부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지식만 전달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아이들의 마음을 알아야하는데 좀 더 친근하게 다가 갈 수 있는 수업을 고민하다 놀이나 보드게임등 몸으로 움직일 수 있는 활동을 배웠다. 어른들이 정해놓은 길이 아니라 본인들이 정하고 가는 길이라 자기주도화 되어있는 역량강화의 수업은 아이들로 하여금 몸으로 할 수 있는 활동을 끌어내야만 한다. 이론과 지식이 합쳐진 놀이의 전문성 장착이 필요한 놀이활동. 바라는대로, 구상하는대로, 지역사회에서 청소년들과 함께 호흡하는 곽미아선생은 처음보다는 할수록 더욱 두려워지는 수업에 자신감이 붙을 때까지 스스로 꾸준히 성장하기를 소원했다.

 

달맞이학교 가는길

곽미아선생은 어두워진 정왕의 거리를 총총거리며 걷는다. 사단법인 더불어함께사무실에서 하고 있는 달맞이학교의 어르신들에게 국어 수업을 해주러 가는 길이라고 한다. 2주에 한번 돌아오는 문해교육으로 6명의 선생님들이 돌아가면서 6명의 어르신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것이다. 20191월부터 시작한 달맞이학교는 검정고시반부터 시작했다. 도덕 교과를 맡아서 했는데, 당시 한창 대학에서 철학의이해에 대해 공부할 때라 요청이 들어왔을 때 큰 두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봉사할 수 있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했기에 흔쾌히 받아들였는데 그래도 수업이니 인강 듣고 기출문제 풀어가며 수업에 임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낸만큼 소박하지만 고귀한 꿈을 막 실현시키고 있는 아름다운 강사 곽미아. 그럼에도 그녀는 아직도 헤메고 있다고 한다. 매일 뭔가를 도전 중이고 부딪히고 깨지고 있다며. 그러면서 조금씩 성장 중이라며. 과거의 곽미아는 야무지고 확실한 일처리에 늘 자신감이 넘치고 열정이 있었다면, 미래의 곽미아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있는 온화한 미소의 선생님이지 않을까? 미래로 가는 도중 지금의 곽미아선생은, “내 일을 자신감있게 해낼 때 가장 멋질 것 같다.”며 수줍게 미소 짓는다.

 

* 이 사업은 시흥아동·청소년지원네트워크 주관·주최, ()더불어 함께가 기획하고 삼성꿈장학재단에서 후원합니다. '당신을 만나고싶습니다 YOU' 사람을 지역의 자원으로 발굴, 연계하여 지역력을 높이는 일을 목적으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