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선과장은 임기 2년 남겨놓고 명예퇴직을 했다. 이유를 물었다.
“욕구, 욕망, 욕심은 패망의 3요소다. 후진 양성을 위해 선대가 자리를 마련해주어야한다”는 평소 소신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시니어클럽에 가입해서 정왕동 그린센터 계근실로 배속받아 출입차량 계근 및 내방객 안내 일을 하고 있다. 퇴근 후 찾는 농장은 그의 인생 후반기 안식처다. 흙이 있고 막걸리 한잔 할 수 있는 벗이 있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그는 퇴직 후의 삶을 정년퇴임 10년 전부터 준비했다고 한다. 시청에서 보았던 말끔한 신사의 모습은 없었다. 겨울이라 앙상한 가지 속 숨결을 손끝으로 느끼며 구찌뽕 나무를 손질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농부의 모습이었다.
그는 농장 한 켠 놓아두있던 두꺼운 노트 3권을 건네주었다. 군자동에서 동장으로 근무할 때 적은 일기장이라고 한다. 술 마시고 쓴 것들도 있는데 건질만한 내용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훑어보라고 했다.
군자동에서의 일상은 소소했다. 이희선동장은 유관단체들과의 관계에 주력했던듯하다. 세권의 일기에는 유관단체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그들과의 웃고, 울던 부분들이 꽤 디테일하게 적혀있었다. “동에서 일어나는 일은 동민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소신은 봉사의 기회 제공과 동시에 유관단체 활성화 및 자립을 위한 분위기 조성에 있다고 적혀있다. 쏟은 애정만큼 실망이 있던 부분에서는 서운함을 감추지 않으며 비록 결과는 미약했지만 유관단체 형성의 주류를 바꾸었다는 것에는 잘했다고 생각한다. 남의 일기장을 본다는 건 꽤 재미 난 일이다. 그의 소소한 과거의 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이희선의 좌충우돌 일기
2008년 9월, 동장으로 내려가면 좌천이라고들 하는데 나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기술토목직이었던 나는 이해관계가 복잡한 민원대응, 각종 공사와 계획등 인.허가 업무에서 해방되어 줄곧 기쁘고 즐거운 삶이었다. 이해관계가 없는 일 자체가 행복이었다.
2009년 10월 3일(토) 정왕동 체육공원에서 제20회 시민한마음체육대회를 개최했다. 장문순 전임동장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시민한마음체육대회 출전 1주일 남겨두고 부임한 나는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어 그야말로 맛있게 먹었다. 그날은 군자동의 역사를 다시 쓴 날이었다. 줄다리기 공동1위(군자동, 은행동-결승에서 총소리 못들었다고 우겨서 공동1위한 것) 단체줄넘기 99회 2위, 400m계주 1위, 세발자전거 남자부 2위, 여자부1위, 공굴리기 3등으로 종합우승을 했다. 동민들은 20년만에 처음 종합우승했다고 ‘이희선동장이 와서 복받았다’는 말을 했다. 우승컵에 소주2병, 맥주4병을 부어서 마셨다. 동장은 이런 맛에 하는가보다 생각했다.
11월 19일(수) 올들어 가장 추운 날씨다. 공군 제8530부대 위문공연을 다녀왔다. 민.군 화합행사다. 군인들과 주민들이 준비한 공연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군인녀석들, 부녀회에서 만든 음식을 정말 잘도 먹는다. 이 부대의 인식은 좋았다. 최경환(전 군자동체육회장)수송관이라는 이가 민과의 유대관계를 잘 하고 있었다.
2009년 1월 24일 ~27일 설 연휴
대설주의보가 내렸다. 제설작업에 임할 남자직원이 없어 애를 먹었다. 시의 미래에서 재난상황발생 시 대처할 사람이 전무할 것 같다. 의식변화와 참여, 공무원의 기본적 자세변화 없이는 대책이 없을듯 하다. 신규공무원 임용시 70%가 여자다. 우리동은 언덕이 많아서 사전에 염화칼슘을 갖다 놓고 봉사자를 지정해놓아 별 민원없이 초동 대처를 잘 한듯 하다. 이번 설명절은 눈으로 얼룩덜룩.
2월 19일(목) 군자초등학교 졸업식이 야외 운동장에서 있었다. 한마디로 생태가 동태되었다. 단상에 앉아있는데 어찌나 추운지... 다른데는 모두 강당이나 다목적실에서 하는데 졸업생이 240명이고, 강당도 없고해서 운동장에서 한다고 한다. 졸업식 참석은 마지막인데 끝내 기억을 남기는 졸업식이 되었다.
6월 17일(목) 노승학 군자 1동대장이 어제 저녁때 전쟁 난 줄 알았다고 하면서 어제 일을 말해주었다. 선부동에서 사람들이 군자봉 일대에 40여개의 낙하산이 떨여졌다고 신고되어서 군.경이 출동했었다는 얘기였다. 천안함 사건 이후 전쟁 분위기가 있다보니 상황이 예민한듯하다. 대통령에게까지 보고 된 사항이라고도 했으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6월 초 어느날,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문득 눈을 들어보니 군자매립지가 보였다. 가장 큰 변화의 물결이 요동 치는곳. 서울대국제캠퍼스가 오고 월곶IC가 없어지고 매립지內 정왕IC가 생기는데 많은 이익을 남기고도 몇몇 직원이 징계를 받은 서러움이 있는 곳. 눈물은 빗속의 비가 되어 흘려내렸다.
6월 25일(금)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15:30분에 300여명의 주민이 있는 가운데서 산들공원 개장식을 했다. 정말 잘 만든 공원이다. 이 지역에 이런 공원이 있다는것이 자랑스럽기도 하다. 이제부터 할 일은 관리다.
9월 6일(월) 태풍 곤파스가 서해안을 따라서 북상한 결과 비는 별로 없고 바람의 피해가 워낙 많았다. 교육중에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일우A앞에 있는 아름드리나무가 넘어졌다. 강풍으로 옥상의 물건이 날라가 행인을 덮쳐서 한도병원에 응급실로 실려간 경우도 있다. 우리시는 두명의 사망사고가 있었다. 모두 낙하물로 인해서.
2010년 3월 25일. 군자도서관 개관식이 있었다. 너무나 멋진 도서관이었다. 임기 중에 생겼다는 것이 뿌듯하다.
2010년 9월 17일(금) 17시 조금 넘어서 인사발령이 있었다. 많은것을 얻고 가며 정을 담아가는듯 하다. 일기장에 수록 기재된 일들은 먼훗날 동에서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아간다. 긴긴 2년의 기록도 이것으로 마무리하지만 훗날 많이 생각날듯하다.
군자동의 망나니(?)라 불리웠던 민원인을 잊을 수 없다. 넝마주이 김공술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싸우다 정든 사람이라고나 할까. 그는 내게 깡패동장이라고 했다. 깡패동장이란 말 듣고 악성민원으로 시달림 받지않는 편이 훨씬 나으므로 담판을 지어 이겼다.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많은 사람들을 그리며 군자동 “사랑합니다”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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