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군자마을이야기/소담소담군자옛이야기

‘굉장’했던 도일5일장, 어린시절은 60여년을 거슬러....

결혼식-군자마을회관

 

장곡리에 살다가 도일시장 골목에 들어온 것은 초등학교 5학년때였다. 그리고 69세가 된 지금, 아직도 그는 그 자리, 그 집에 살고 있다. 이태환씨의 기억 속 도일시장은 말 그대로 굉장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지 지나칠 때마다 몸이 부딪힐 정도였다. 어린 태환씨의 눈에는 시장 자체가 거대한 놀이터였다. 지금도 장날에 들어오는 센베과자는 그 당시 최고 인기 과자였고, 장날 때나 얻어입을 수 있는 옷은 5일장을 기다리게 만들었다.

 

그의 집주변은 싸전이었다. 쌀가게를 운영하던 어머니는 쌀 100가마를 쌓아놓고 파는 거상급 장삿꾼이었다. 군자염전에 큰 차로 하나씩 갖다 놓았다고 하니 그럴만도 하다.

 

군자 5일장? 대단했죠. 어릴 때는 여기 사는게 복을 받았다고 느낄 정도로 장사도 잘 되고 사람도 많고 온갖 구경거리들이 우리집 주변으로 다 있었어요.”

 

마을회관이 없던 넓은 마당에는 천막극장이 들어오고, 그 옆으로 극장건물이 생겼다. 중국 사람이 직접 운영하던 중화루라고 하는 중화요리집도 있었고, 술집, 다방이 유난히 많았다. 그만큼 상권이 활성화 되어있다는 증거이며, 군자시장 초창기 때의 모습이다. “지금 마을회관 건물 옆에 집 있잖아? 거기 코너에 중국집이 있었는데 짜장면이라는걸 내가 생전 처음 먹어봤거든. 세상에서 이렇게 맛있는 것도 있나.. 하고 감탄했었지.”

 

짜장면 요리사가 풍년옥, 황해옥등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일을 했는데, “우리 짜장 맛있어~”하는 말이 재미있었다. “딸이 하나 있었는데, 조그맣고 예뻤어. 그래서 잘 데리고 놀았지. 소꿉놀이도 하고 병원놀이도 하며...”

 

시장 주변은 온통 밭이었고 시장이었다. 지금의 진로마트부터 주유소 삼거리까지가 모두 논이었다. 지금의 시흥시 하중, 장곡, 월곶, 안산 신길, 원곡에서까지 장보러 왔을만큼 도일시장은 동네시장의 규모를 넘어섰다고 한다. 지금은 모두 대지가 되어 가치를 향상시켰다.

 

 

이태환씨는 흥이 많은 군자면 토박이다. 농사 짓는 사람들이 깃발을 들고 꽹과리를 치며 시장 안을 돌면 덩달아 신이 나서 어깨를 들썩였다. 우리 가락이 좋았던 것은 그때부터였다. 초등학교, 중학교무렵... 뒤늦게나마 사물놀이를 배워 슬럼화 된 도일시장을 활성화 시키는데 작은 힘 보태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다.

 

시장에는 고정으로 오는 장돌배기가 많았어요. 우리집 앞에 쌀, 잡곡, 약과 같은 거를 놓고,

주민센터 골목에는 옷가지들, 그 뒷 골목, 더미냉면집 쪽은 채소등 먹는거를 주로 팔았어요.”

 

지금처럼 좁은 골목이 아닌 큰 골목으로 형성되어있던 도일시장은 규모가 상당하다는 토박이들의 공통된 구술증언에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초등학생이던 이태환씨는 친구들과 찐뽕놀이를 했다. 자치기, 술래잡기, 구슬치기, 힘자랑하는 놀이는 다했다. “두 개의 편을 갈라서 집을 짓는 놀이가 있는데, 한쪽에서는 들어오는 길을 좁게 해놓고 못들어오게 막고 상대방이 이 라인에 들어오면 발로 바깥을 찍어 상대를 아웃시켜요. 그게 무지 재미있다고.”

 

큰 마당에서는 씨름도 했다. 씨름대회는 며칠씩 이어졌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남자들에게는 힘 자랑에 으쓱하던 놀이였다. 상품이 걸려 있으니 주변에 씨름 잘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수암, 안양등지에서도 많이 왔다. 씨름은 하루종일 어두워질때까지 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군자중학교 다닐 때 건너편 논에 미군 헬리콥터가 떨어진 것이다. 지금의 팔각정 자리다. “미군차들이 오고 친구들이 구경갔는데 영어선생님이 헬로~ 아이 엠 헝그리~ 기브 미 쪼꼬릿하면 미군들이 진짜로 준다고 했다. 이태환씨는 친구들과 가서 그대로 미군들한테 말했다. “헬로~ 아이 엠 헝그리~ 기브 미 쪼꼬릿그랬더니 진짜로 주었다. “그때만해도 그런게 귀했잖아요.” 미군들 인심은 어린 마음에 좋아보였다.

 

텔리비전이 없던 시절, 장날이면 모두가 신이 났다. 비록 초콜릿은 없었지만, 먹거리, 볼거리가 풍부하여 어린 아이들은 시장바닥에서 노는게 그저 재미있었다.

 

시장에 유일하게 텔레비전이 있던 집이 있었다. 최종환씨로 기억하는데 철물점하고 살 때다. 그 집에서 더러 시청하기도 했는데, 전파사할 때는 홍보용으로 진열대 위에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앞에 거적대기를 깔아놓았다. 동네 꼬마들이 와서 애국가 나올 때까지 보곤 했다.

 

특히 여로같은 드라마를 할 때는 굉장했다. 동네 사람들이 전파사 앞에 모두 모였다. 동네 이웃들이다보니 서로 고구마도 삶아 나누어 먹고, 옥수수도 삶아 먹고 했다. 하루 장사를 마치고 그렇게 텔레비전 앞에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이게 한 힘은 텔레비전과 인기드라마였다. 하루이 피로가 가시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또 하나의 유일한 문화생활은 천막극장이었다.

천막극장이 오면 우리집 앞으로 통로를 막아. 그런데 우리 집에서는 통하거든. 그럼 동네 사람들이 낮에 우리집 안에 들어와있어. 밤에 영화 상영하면 바로 나가면 됐거든. 우리집은 뭐 문만 열고 나가면 바로 극장이니까. 이런 일도 있었어요. 옛날엔 바닥에 가마떼기를 깔았거든. 쌀가마가 84kg 정도 되었다고. 거적떼기라고도 하는데 그걸 다 깔아요, 바닥에다. 그게 장관이야.”

 

쪼그리고 앉아 보던 영화. 아침에 일찍 나가면 바닥에 돈도 많이 흘려 있어 줍기도 했다. 표를 구하지 못해 면도칼로 천막을 찢고 간 사람들도 있었다. 얼마나 영화가 보고 싶으면 그랬을까. 거의 한시간 남짓 걸어서 영화보러 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전국 순회로 다니며 마을에 들어올 때는 차로 다니며 광고도 하고 마이크와 스피커를 높혀 방송을 했다. 방송장비는 천막 안에 탑으로 만들어 높이 올려 송출했다. 장희빈 같은 영화를 상영할때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천막극장은 한 번 들어오면 5일에서 1주일, 길게는 10일 정도 있다가 갔다. 매일 다른 영화를 상영했다.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왔는데, 시장통 사람들은 먹고 살기 바빠 밤에 하는 가설극장은 그래도 보는 편이었다. 그러나 극장 건물은 상설이니 낮에는 사람이 드물었다.

 

마을회관이 들어서기 전, 2층짜리 극장이 있었다. 아래층에서 계단을 올라가면 2층에 상영관이 있는 구조였다.

 

극장에서는 콩쿨대회도 했었다. 그런 날이면 사람들이 많이 몰렸다. 명절에도 극장을 대관하여 놀기도 하고, 배뱅이굿 이은관, 만담가 장소팔, 고춘자도 다녀갔다.

 

극장이 들어선 시기는 65년도로 기억한다. “극장 운영하던 권씨가 아버지 친구 분인데 중학교 때 극장에 들어가 태권도 양발차기 연습하다 들켜 혼나기도 했었어영어로 된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았는데 무서웠던 기억만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극장은 3년 남짓 한 시점에 문을 닫았다. 두사람이 동업을 했는데 생각만큼 돈벌이가 되지 못했다. 이후 복싱장이 만들어지고 오랜 동안 방치되다가 80년대 초반, 극장을 철거하고 자동차학원 주행연습장이 만들어졌다. 그때가 1975년쯤이다. 그 해 이태환씨는 제대하고 군자면사무소 별관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지금은 너무나 작고 초라한 시장의 모습이지만, 어릴 때는 이동네 사는걸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했었다. 청년 이태환씨는 전파사를 운영했다. 쌀가게를 하던 어머니의 가게 반을 뚝 잘라 한쪽에 중앙전파사를 차렸다. 전파사를 하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시장 골목에는 전파사가 많았다. 지금의 프랑스빵집 자리에 전파사가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도 라디오기술자 변씨의 기술력이 대단해 보였다.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은 결국 전파사를 차리게 만들었고, 80년대 들어서 가전 기술이 빠른 속도로 변하는 바람에 따라갈 수 없어 접어야했다.

 

우상이었어 변씨는. 모든 것이 손으로 때우던 시대라 가정집 스피커를 고칠때 종이를 돌돌 말아서 땜질을 하는데 그걸 보고 나도 저걸 해야겠다생각한거야.”

 

개발바람에 따라 굉장했던 도일시장은 시장 안 사람들을 바꾸어 놓았고, 90년대 이후 급격한 슬럼화로 화려했던 옛 도일시장의 명성은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쌀가게, 전파사, 그리고 지금의 소라헤어까지, 이태환씨는 시장 안 몇몇 종묘사와 5일 장날이면 여전히 들어오는 장돌뱅이들과 함께 시장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격동의 시절을 함께 나눈 도일시장에서의 삶을 뒤로 한 채 그는 그 자리에서 여전히 2018년을 살아가고 있다.

글.허정임/사진.이상봉

* [소담소담군자옛이야기 수록] 글과 사진의 저작권은 군자동행정복지센터에 있으며 동의하에 '아름다운 시흥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블로그에 포스팅함을 알립니다. 책을 받아보시고 싶으신 분은 군자동행정복지센터에서 무료로 신청하세요. [문의:031-310-44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