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동 새미마을. 거모4통. 미군부대가 있던 곳. 송암동산과 미사일 부대가 나란히 있는 곳. 작은마을이지만 굉장한 마을이다. 수백년의 깊은 역사마저 깃들어있으니 만만히 볼 마을은 아닌듯하다.
한상소씨는 1952년 새미에서 태어나 13대째 살고 있는 잘난(?) 토박이다. 새미마을은 청주한씨의 집성촌이다. 그 역사만 400여년이다. 지금이야 다양한 성씨의 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있지만, 옛날에는 한씨 가문만 살았던 동네다.
70을 바라보는 동안 많은 일들을 겪었고 많은 마을의 변화를 보아왔다. 겹겹이 쌓여온 세월은 지워두고 지금은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이웃과 더불어 즐거운 삶을 보내고 있다. 특별한 직업은 없다. 운동하면서 통장일을 보는 것이 인생의 낙이다. 그래서 그런지 70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단단해보인다.
“일은 무슨.. 그냥 슬슬 놀때지. 통장일 보는게 내 최고의 본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말 속에 익살과 여유가 보인다. 소방대장과 함께 통장일을 20여년째 보고 있다. 장기집권이다. 그래도 떳떳하다. 왜냐면, “할 사람이 없어서”다. 예전에는 회사를 운영하기도 했지만 정리하고 낙향하여 고향을 위해 봉사만 하고 있다. 나름 헌신한다 생각하며 하고 있는데 주변에서 인정해줄지는 모르겠다.
새미마을. 예쁜 이름이다. 무슨 뜻일까? 원래는 ‘사미’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사미, 사미하다가 새미라고 부르게 된거지. 사미가 실사(絲)에 아름다울미(美)자 쓰는데, 여기가 비단 짜는 동네야.” 그 사미마을에 바단 짜는 아가씨 ‘옥녀봉’이 있다.
“새미 뒷산 봉우리가 옥녀봉이야. 옥황상제 딸이 거기 살았다고 하는데, 옥녀봉의 모습을 보면 참 재미있어, 옥녀봉 앞을 보게 되면 치맛자락처럼 늘어져 있거든. 그래서 ‘치맛골’이라고 해. 거기가 부대 앞, 송암동산 올라가는길 쪽에 해당되고 그리고 저쪽 건너편을 똥골. 왜 똥골이냐고 하면 뒤거든. 앞엔 치맛자락이니 당연히 뒤는 엉덩이 부분일거 아냐. 그래서 똥골이라고 했어. 재밌지? 옥녀라는 아가씨가 앉아있는 모습이야, 이렇게. 우리 동네에서 이름을 붙이기를 그렇게 붙였어.” 그림을 그리면서 설명해주니 쉽게 이해가 가는 옥녀봉 모습이다. 과연 낭자가 치마폭 여미며 다소곳이 앉아있는 모습이다.
400여년의 세월이니 한상소씨가 그려 낸 역사 속 사미마을도 많이 달라졌다. 자연부락의 경치는 모두 사라지고 없으며, 도시화는 이웃도 변화시켰다. 공장이 들어오고 주택의 모양도 달라졌다. 급변하는 도시 속에 더디가는 아파트 개발사업은 지연되어 이미 이사 나가 폐허가 된 주택들로 마을은 스산해진 모양새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1965년 경으로 추정하며 마을에 미군부대의 주둔이 시작되면서 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기지촌과 외부유입 인구를 위한 쪽방 마련은 새로운 주택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내가 태어날때만 해도 마을에 집이 한 40호, 50호 정도 됐지. 크지는 않았어. 아담한 마을이었거든.”
사미마을은 ‘경제중심지’였다. 미군들로 인해 마을이 형성되다시피했기 때문에 여느 농촌지역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미군부대를 중심으로 각종 필요 직업군이 생기면서 생계를 이어나가는 집이 대부분이었다.
마을사람들은 미군부대 주둔기지라고 해서 그다지 불편해하거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지는 않았다. 농사지으면서 살고 또 밥을 굶는 사람들도 많았던 때이기에 군부대에서의 일자리는 돈벌이에 괜찮은 곳이었다. 도일시장이 상권이 컸지만 새미 장터도 작은 규모로치고는 돈의 흐름이 알찼다. 도일시장은 5일장이었지만. 새미마을의 시장은 상설시장이었다. 클럽, 양복점, 면세점, 전파사등등 다양한 상가가 있었으며, 밤문화가 화려했던 곳이었다.
미군부대에서의 일은 산이 무너지면 축대를 쌓는 일이나 일용직이 대부분이었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노무자들에 의해 지어진 건물에서 일하는 이들을 ‘하우스보이’라고 불리웠다는건 마을의 특징으로 나타났다. 하우스보이란 말그대로 하우스에서 심부름 하는 사람을 뜻한다.
우리나라 국력이 미천한 시대여서 분쟁이 생기면 억울한일도 당하곤 했지만, 어린 마음에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사는거니 하고 살았다. “어린 우리들이 뭘 아나? 헬로 기브 미 초콜렛하면서 얻어먹는거에만 재미들렸지”
사미마을에는 아직 그때의 잔재가 남아있다. 부대올라가는 길에 5평 정도 되는 쪽방들이 그것이다. 시대가 변했지만 아직도 더디 가는 시계 속에 남아있는 곳이 지금의 새미마을이다.
미군부대가 들어올 때는 100가구 이상도 살았던 것이 이제는 30여가구만 남았다.
4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새미마을 청주한씨 가문의 자랑을 해달라고 했다.
뜻밖의 답이 날라온다. “나!”
“나밖에 없지! 이기는게 강한게 아니라 남은 자가 강한거라니까?”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고향에 아무것도 없으니 들어오고 싶어도 들어올 수가 없다. 남은 터전이 없기 때문이다. 그 옛날 천석꾼, 만석꾼 사람들이 말하기를 절대 벼슬을 높이 갖지마라, 벼슬은 진사까지만 해라, 전쟁에 휘말리지 마라 했다. 멸문을 당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벼슬과 재산을 보유했으나 지금은 역사 속 한 줄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이런말을 남긴다.
“權不十年(권불십년)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 십년이면 흥망성쇠가 바뀌잖아. 10년후에 보면 어? 어디갔지? 이러거든. 끈질기게 남은 사람들이 밥 세끼 먹는거야. 돈만 벌면 뭐해, 벼슬이 뭐가 중요해.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는 법이거든. 봐! 원래 못난 소나무가 산 지키는거야. 삐뚤삐둘하면 누가 베어가? 나 봐! 나 하나 남았잖아.”
*글:허정임/사진:이상봉
* [소담소담군자옛이야기 수록] 글과 사진의 저작권은 군자동행정복지센터에 있으며 동의하에 '아름다운 시흥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블로그에 포스팅함을 알립니다. 책을 받아보시고 싶으신 분은 군자동행정복지센터에서 무료로 신청하세요. [문의:031-310-4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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