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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마을이야기/소담소담군자옛이야기

황해-그리운 이름을 도일시장에 심어놓고...

 

[옛황해옥 주인-최복순할머니]

 

남편과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서울에서 내려와 부모님과 함께 황해옥을 운영한 것은 29살 되던 해였다. 10년 넘게 하던 황해옥은 마흔살에 힘이 들어 접고, 이후 시장 안에서 유리가게, 페인트가게, 그릇가게. 슈퍼마켓을 운영했다. 할머니는 도일에 들어와 딸 하나를 더 두었다. 60이 넘은 큰아들과 194cm의 큰 키를 자랑하는 손주와 함께 살고 있다. 57살 된 둘째아들은 중국에서 살고 있다. 최복순할머니의 고향은 황해도다. 21살에 인천에서 거모동으로 들어왔다. 23살에 결혼하여 서울에서 살았다. 29살 되던 해, 도일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부모님 곁으로 다시 내려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지금 최복순할머니의 나이는 84세다.

 

첫 아이를 갖고 돈이 없어서 부모님에게 그때 돈으로 오천원을 받아 개발 예정인 서울의 한 동네로 이사를 갔다. 작은아들이 돌 지났을 무렵 군자동으로 내려왔다. 남편이 능력이 없어 처가살이를 했다. 그때 아이들 나이가 5, 2살이었다.

 

   

 

[70년대 군자국민학교 운동회]

 

낯선 땅, 낯선 환경에 적응하며 힘겹게 살아도 할머니는 자식 교육만큼은 극성이다 싶을 정도로 열과 성을 다하였다. 그래서 셋만 낳고 더 낳지 않았다고 한다. 안양으로, 서울로 유학을 보내 공부를 시킨 탓에 지금은 엄마의 고생을 보상이라도 하듯 잘 모신다. 당신은 굶어도 자식 공부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시켜야 한다는 할머니의 교육철학은 때론 할아버지와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돈도 없는데 자꾸 공부 시킨다는 잔소리가 심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황해옥에서 배달일을 도와주었다. 막내라 생활력이 없던 할아버지는 2006년에 암으로 세상을 먼저 떴다.

 

 

[황해옥]

 

할머니의 고향은 황해도이다. 가족들 모두가 피난을 내려왔다. 가족이 한번에 다 내려온 것은 아니었다. 어느 섬을 거쳐서 한 명씩 몰래 몰래 왔다. 내려 온 이유가 뭘까?

 

할머니의 집은 이북에서 꽤 사는 집에 속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사업 수완이 좋고 성실했다. 열심히 일을 했는데 이북에서는 가족의 돈을 모두 뺏으려고 했다. 지주의 신분으로 농사를 지었을 때는 땅을 빼앗겼다. 목화가 많은 이북에서 솜 트는 기계를 몇 대씩 들여 무명을 짜는 일도 했었는데, 큰 돈을 벌었지만 미군이 모두 불태워버렸다. 농사도, 사업도 모두 빼앗겨 더는 이북에 있을 수 없었다. 열심히 일을 해도 내 것이 될 수 없는 그곳에서는 삶에 희망을 찾을 수 없었다.

 

   

 

[70년대 군자국민학교 운동회]

 

남한으로 피난 내려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사람씩 내려와 가족 모두가 만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해주(지금의 수원 정도)에 집을 사두었는데 그곳에 살다가 인천에 처음 정착했다. 이북에서의 사업 경험을 기반으로 황해제과라는 공장을 차렸다. 고향이 황해도이기에 사업명은 모두 황해를 썼다. 황해제과, 황해옥의 이름은 고향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황해제과는 날로 번창해갔다. 하는 일마다 잘되었다. 집도 3채나 샀다. 그런데 안정적인 생활도 잠시, 집안 친척에 의해 부도가 났다. 가세는 기울고 재산을 거두었다. 그래서 이사 한 곳이 60년 이상 살게 된 지금의 거모동이다.

 

거모동에는 20살에 이사왔다. 당시 5,800원을 주고 황해옥 건물을 샀다. 집은 수수깽이 울타리가 쳐져있었다. 가게라고 할 것도 없는 건물들도 주변에 몇 개 있었다. 동사무소 올라가는 큰 길도 있었고, 마을금고 앞에 있는 골목에는 집이 있었다. 시장 안은 온통 빨간 흙길이었다. 그리고 유난히 씨앗가게, 다방등이 많았다.

    

 

[소풍 구준물-최복순씨의 친정어머니]

 

지금 씨앗 파는 곳에 공동우물이 있었는데, 물도 길어다 마시고 빨래도 하고 김장도 함께 했다. 물 맛은 참 좋았다.

 

울타리로 둘러져친 집은 세월이 흐르면서 기와를 올리고 방을 나누고 홀을 만들어 식당의 모습을 갖추어갔다.

 

거모동 도일시장에서의 장사는 힘들다기보다 서러웠다. 황해옥 하기전에 고무신 장사를 했었는데, 외지인이 들어와 장사를 하니 모든 것이 낯설었다. 도일시장은 매우 컸으나 토박이들의 눈치를 보느라 장사가 잘 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의 안산 신길동자리에서 시작한 구멍가게는 그저 시장과의 낯을 익히는 자리가 되었다.

 

군자주민들의 텃세는 생각보다 심했다. 황해옥을 만든 최복순할머니의 친정어머니도 시장 상인들에게 다가가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을 보내고 시장에서 부대끼며 사니 이름이고 얼굴이고 알아보는 눈이 생겼다. 그 다음부터는 서로 챙겨주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이웃이 되었다. ‘군자애라는 여성 최초의 친목회 그룹을 만들어 놀러다닐 정도로...

    

 

[70년대 군자국민학교 운동회]

 

부모님이 하던 황해옥은 여동생까지 시집가고 나서 시작했다. 황해옥은 큰방 두 개, 작은방 이 다섯 개, 그리고 홀이 있었다. 황해옥은 지금의 새마을금고 자리였다. 황해옥은 술집이라기보다는 한식당이었다. 진로 소주를 팔았고 삼합도 같이 내갔다. 직원도 많이 두었다.

중식 직원 2, 한식 직원 1명이 있었는데, 메뉴는 짜장면, 냉면, 설렁탕, 볶음밥, 동태찌개 등등을 팔았다. 저녁이면 아가씨들은 홀 서빙을 하며 술 손님을 받았다 

 

 

[70년대 군자국민학교 운동회]

 

군자염전에 다니던 사람들은 월급 날이 되면 황해옥으로 왔다. 어떤 사람은 농사 일 년 해서 받은 세경으로 술마시는데 탕진해 썼다. 투전하는 사람도 있었다. 술을 팔다 보니 볼썽 사나운 일도 더러 벌어지기도 했다. 홀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면 여종업원들을 보호하며 맞서야 하는 것은 할머니의 몫이었다. 덕분에 군자파출소를 잘도 다녔다. “별사람 다 있었어. 남자들이 월급 받으면 여기와서 술을 마시니 집 여자들이 좋아하나? 와서 아가씨들하고 싸우고 나는 말리고. 지서에 끌려가고 합의하고, 싸움 많이 했어.”

 

지금의 40대 중반 이상 토박이들은 황해옥, 풍년옥, 덕신옥을 기억한다. 풍년옥은 깨볶는부부 방앗간골목의 베지밀 대리점 자리였고, 덕신옥은 가운데 골목 집 3층이었다. 덕신옥은 한식이 주 메뉴여서 어떻게 보면 라이벌 상대이기도 했다.

 

 

[럭키슈퍼-지금의 군자동 새마을금고자리]

 

웃음 나는 얘기 하나 할까? 내가 장사를 해도 사람 얼굴을 잘 몰라. 한번은 슈퍼를 할땐데 어느 날 손님이 왔는데 이 손님이 안가는거야. 다른 사람들은 다 가는데.... 왜 안가요? 뭐 찾는거 있어요? 했더니 사촌올케인거야. ‘나 누구 애미예요하는데, 어찌나 기가차고 우스운지... 그럴 정도로 내가 사람 알아보는게 둔해.”

 

 

[70년대 군자국민학교 운동회]

 

도일시장에서만 64년을 산 최복순 할머니는 요즘, 가만히 있으면 피난 나오던 생각, 친구들 생각, 고향생각을 많이 한다. “어떻게 세월이 이렇게 속절없이 흘렀는지...” 격동의 세월을 온몸으로 부대끼며 도일시장 안에서 살아 온 최복순할머니. 럭키슈퍼에서 찍은 사진 속 여인 최복순은 없지만, 총기만큼은 남아있어 그때의 기억을 쏟아낸다. 황해옥은 어린 아이들에게 짜장면이라는 최고의 음식을 맛보게 해주었고 염부들의 술한잔 자리 만들어 준 서민들의 울고 웃는 사랑방이었다. 다시 돌아간다면 황해옥으로 가리라.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고 내 이웃이 있던 그 때로...

 

 

[70년대 군자국민학교 운동회]

 

 

 

[럭키슈퍼-지금의 새마을금고자리]

 

 

[럭키수퍼 내부]

 

 

[럭키수퍼 내부]

 

 

[럭키수퍼 내부]

 

 

*글.사진:허정임/사진출처:최복순

 

* [소담소담군자옛이야기 수록] 글과 사진의 저작권은 군자동행정복지센터에 있으며 동의하에 '아름다운 시흥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블로그에 포스팅함을 알립니다. 책을 받아보시고 싶으신 분은 군자동행정복지센터에서 무료로 신청하세요. [문의:031-310-44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