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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마을이야기/소담소담군자옛이야기

[김천복독립운동가의 후손, 김화진]-50년만에 찾은 내 마을

[좌]김천복의 친조카 김윤진 [우]김천복의 장녀 김화진

 

화진아! 군자초등학교에 3.1운동 독립기념비가 세워졌더라. 보니까 큰아버지 이름이 있어. 가자!” “! 가요, 오라버니!”

 

떨리는 마음으로 찾은 군자초등학교 교정 독립기념비 앞. 99주년 3.1절 기념행사 이전, ,세 번 가량의 방문 흔적은 기념비 아래 하얀꽃, 빨간꽃으로 남겨져 있었다.

 

김천복의 일가

김천복(金千福. 1897~1968)애국지사는 시흥군 군자면 죽률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제는 아래로 김만봉, 김만동, 김만손, 김만분 이렇게 3명의 남동생과 한 명의 여동생이 있었으며, 막내인 김만분씨는 2016101세의 일기로 형제들에게로 가셨다. 김천복지사는 슬하에 홍역을 앓다 호적에도 올리지 못하고 먼저 떠나보낸 아들 김광주씨와 김화진, 김현진(김광연), 김수진 사남매를 두었는데, 김현진씨는 군대에서 전사했고, 막내딸 김수진씨는 미국에 살고 있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후손은 김화진씨이며, 그녀는 지난 3.1절 기념행사에 이종사촌인 김윤진씨와 함께 처음 참석하였다.

    

 

 

정의로운 성품이 태극기에 물들어...

김천복지사는 191944, 약관 22세의 나이에 기미년 3.1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날 당시 주민 수십명을 동원, 군자면사무소와 주재소를 습격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인물이다. 면민들의 삶을 향한 치열한 싸움은 태극기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오로지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마음 하나만 안고 분연히 일어난 것이다. “군자면사무소로 경찰들이 와서 탄압하고 총쏘고 그러니까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다 도망갔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지가 그때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간거죠.” 김화진씨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한문에 능통하고 올곧은 인격에 머리가 비상한 분이었다. 정의로운 성품까지 더하여 나라를 빼앗긴 상태에서는 더이상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을거라는 생각에 들고 일어났을거라고 한다.

 

어린 시절인지라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많이 없지만, 아버지의 온몸에 나 있는 고문의 상처들은 또렷이 기억한다. “아버지가 총각 때부터 독립운동을 해서 결혼을 늦게 했어요. 결혼하기 전에 옥고를 치렀는데 온 몸에 그때의 후유증이 남아 있었어요.” 어느 날, 아버지가 등을 긁어달라고 했다. 아버지의 등에는 온통 인두 지진 자국등 흉터로 가득했다. 모진 고문의 흔적을 본 어린 마음은 몹시 아팠다. 김윤진(김천복의 친조카 83)씨가 말을 보탠다. “만세운동한 것만으로 고문을 당한 것 같지는 않아요. 큰아버지가 주모자인데, 워낙 곳곳에서 일어나니까 지령 내린 사람이 있지않을까, 누가 시흥시 군자면에 나서서 해라 또 누구는 어디 나서서 해라, 이렇게 조직적으로 지령을 내린 사람이 있었지 않겠느냐 해서 고문을 했다고 생각하는거지. 누가 있어, 없지. 근데 일본순사들이 믿지 않는거야.”

 

아버지와의 즐거웠던 추억보다는 힘든 일만 있었던 어린 화진씨의 기억 속, 아버지의 얼굴은 어떤 생김일까? “턱 쪽에 이만한 혹이 나와 있었는데, 매를 맞아서 뼈가 퉁겨진거라 하더라구요. 지금 세상같으면 수술하면 되는데 그때는 뭐 그런게 있나...” 나라 잃은 설움에 모진 고문, 그리고 그 후손들이 겪어내야했던 처절한 삶은 시대가 바뀐 최근까지도 계속되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어떠했냐고 물었다. 너무 슬픈 답이 돌아왔다.

 

실종이 되셔서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제가 알기로는 옛날 군자면에 쌀 받으러 갔다가...” 그렇게 김화진씨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14살에 멈춰버렸다.

 

 

[그림 윤원진작가]

 

14살에 멈춘 아버지의 기억... 그 참담한 세월

아버지가 실종 된 후 어머니와 두 동생과의 삶은 퍽퍽하기만 했다. 아버지가 남긴 볏가마로 1년 가까이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지만 어머니 혼자 삼남매를 키운다는 것은 말로 표현 못할 힘겨움이었다. 한 입이라도 덜기 위해 철 모르던 18살 시절, 시집 가야만 했던 김화진씨. 어머니도 멀리 이사를 가버려 간간이 주고 받는 편지 외에는 소식을 접할 수 없었다. 송탄 미군부대 골프장에서 캐디로 일하던 여동생이 미군과 결혼해서 이민을 간 후로는 더욱 볼 수 없게 되었다. 동생이 어머니를 미국으로 모시고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미국에서 돌아가시고 묘지도 그곳에 모셔져 있다. 독립만세를 외치던 남편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도 못한채 이역만리 타국에서 눈을 감고 묘까지 그곳에 있으니 이 어찌 한스럽지않다 할 수 있을까... 그 세월만 50여년이다. 함께 오래도록 옆에서 보고 살았다면 아버지에 대한 어떤 이야기라도 들을 수 있었을텐데... 좀 더 형제들과 오래 살았으면 좋았을텐데... 모든 것이 돌아보면 서럽고 아쉬워 한숨섞인 눈물만 그렁거려질뿐이다.

 

지켜 낸 나라, 지키지 못한 가족

김천복지사는 만세운동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1년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또한 만주독립운동을 한 일로 3년을 더 복역했다. “군자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서대문형무소가서 영창 살고 나왔는데, 나와서까지 피해다니면서 계속 만세운동하니까 일본순사들이 옥에 집어넣으려고 막 잡으러 다니고... 견디질 못한 거예요. 그래서 만주로 갔는데 거기서도 독립운동하다 체포되서 또 3년 영창살이 하고 나오고.. 다시 와서도 독립운동하고, 그러는 바람에 늦게 결혼해서 나를 낳았다고 해요.” 작은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다.

다행히 형제들에게까지 피해가 가지는 않았다. 인천, 김포등 따로 떨어져 살아서다. “셋째 작은아버지는 신체에 결함이 있었거든, 다리에. 그리고 약간 모자란 편이었는데 그때 그 분이 달월에서 살았어요. 달월에 살았어도 형제간에 대화가 잘 안되니까 일본순사들이 제쳐둔거지.” 그러나 큰형과는 대화가 잘 되었다고 한다. 방에 들어가면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하고 한참동안을 이야기 나누다 나오곤 했단다. “나중에 아버지 통해서 얘기 듣는데 너희 큰아버지는 아주 강한 정신력을 가졌다. 독립을 해야하는데 이게 되지 않으니 일본에 원한이 맺혀있다는 말을 들었지요.”김윤진씨의 말이다.

    

[시 전영준작가]

 

팔십이 되어 만난 아버지

김천복(金千福. 1897~1968)지사는 191944일 군자면 죽률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던 독립운동가다. 군자면에서 권희, 강은식, 윤동욱등과 함께 면민 1천여명이 집결하여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후 일본순사들에게 체포된 그는 심한 옥고를 치렀다. 모진 고문 후유증에도 나라를 잃은 설움과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일념 하나 밖에 없었다. 뒤늦은 결혼으로 슬하에 22녀를 두었으나 아들 김광주씨는 홍역을 앓다 죽고, 김광연(김현진)씨는 군대에서 전사했다. 그 후손인 김천복의 장녀 김화진씨가 201831. 3.1절 기념행사장이 열린 군자초등학교 독립기념비 앞에 처음으로 섰다. 아버지의 함자가 새겨진 기념비를 보며 그녀는 두 손모아 절하였다. 뜨거운 회한의 눈물이 찬바람에 시려내린다. 피로 희생한 독립운동가의 자손이지만, 해방과 6.25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서러움을 겪었던 김화진(인천거주 80). 김천복애국지사의 장녀지만 다른 사람의 호적에 이름이 올려져 내 아버지가 김천복이노라 하는 증명을 보이기까지 또 한번의 눈물을 흘려야했다.

 

화진씨의 3살 터울 남편은 결혼하고 얼마 후 바로 군대에 입대했다. 마음 의지할 곳 없는 결혼생활은 외로웠다. 군인 생활을 하던 남편으로부터 어느날 전갈이 왔다. 결혼한 군인은 제대를 일찍 시켜준다는 내용이었다.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으니 시어머니가 혼인신고를 위해 이웃집에 호적을 올리려고 했다. 가족과 연락이 끊겨 원적은 물론이고 가족의 기록을 전혀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시간을 달라고 했다. 가족을 찾으면 준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그저 아들의 빠른 제대에만 신경을 쓸 뿐 전혀 사정을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동네 이장님 호적에 제가 올라갔지요.” 그냥 그렇게 호적에 무딘채로 살았다.

 

그러다 2005년경. 사촌오빠인 김윤진씨와 연락이 닿았다. 아버지의 명예를 찾자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잘못 된 호적도 정정하자했다. “내가 김천복의 딸이 맞는데...” 그러나 친아버지와의 친족 확인은 쉽지 않았다. 결국 변호사를 선임하여 호적부터 바로 잡는 작업을 했다. 남의 호적에 올라 김화자로 살아온 김화진씨는 호적 정정 작업을 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60년 당시 친정에서 자신을 사망했다고 신고를 한것이다. 기막힌 일이었다. 이유를 알아보니 당시 군대에 간 남동생이 전사해서 국가로부터 약간의 연금이 나오는데 누나가 있으니 제 값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려운 가정 형편은 그저 연금 한푼이 아쉬운 상황이었다. 서류상 죽은 사람을 되돌리는 작업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미국에 살고 있는 여동생과 DNA 검사로 가족임을 증명했다. 그렇게 호적은 46년만에 정리되었고, 김천복지사의 후손인 장녀 김화진으로 세상에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김천복(金千福), 오순덕(吳順德)의 이름이 적혀있는 호적을 보며 감격에 겨웠다. 그리고 마침내 2009815. 인천보훈지청은 독립유공자의 유족에게 독립유공 애족지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하루에 열댓번 버스를 타고 다니며 호적을 바로 잡기 위해 인천, 화성, 시흥, 서울등지로 다니며 힘들어도 힘들다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오로지 하나의 일념, 후손들에게 당당하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리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군자초등학교 내 시흥시 삼일독립운동 기념비]

 

201831. 99주년 3.1절 기념행사장을 찾은 김화진씨와 김윤진씨, 그리고 그 후손들은 시흥시와 군자동주민들, 독립유공자 가족들 앞에서 애국선열들이 외쳤던 대한독립만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많은 시민들이 뜻을 같이해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2018년 7월 생금어린이공원에 독립지사 김천복 기념비를 세웠다.

 

 

3.1 운동 독립정신 /죽률 김윤진

 

기미년 삼월일일 방방곡곡에서 분연히 일어나

 

대한독립만세소리가 삼천리에 울려 퍼진다.

 

일제의 갖은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하늘을 찌른다.

 

 

군경이 시위 군중에 마구 쏘아대는 총탄에도

 

의연하게 맞선 독립군들은 정정당당하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잃었던 조국을 되찾기 위해

 

신명을 다한 애국지사들 우리 겨레의 독립정신과

 

평화애호정신을 기리 빛 내리

 

3.1 운동 독립투쟁을 하다 체포되어 온갖 형벌에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옥고를 치렀을까!

 

독립운동 선열들의 자주독립 정신과 숭고한 희생정신을

 

후손들에게 올바르게 교육시키도록 널리 알리어

 

독립운동의 넋을 기리어 후세에 남기고자 함이다.

 

*사진:김종환,허정임/글:허정임/삽화,켈리체:윤원진/시:전영준

 

* [소담소담군자옛이야기 수록] 글과 사진의 저작권은 군자동행정복지센터에 있으며 동의하에 '아름다운 시흥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블로그에 포스팅함을 알립니다. 책을 받아보시고 싶으신 분은 군자동행정복지센터에서 무료로 신청하세요. [문의:031-310-44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