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군자마을이야기/소담소담군자옛이야기

[군자동 장년회 토박이모임] 주름진 개구쟁이들의 그때 그 추억

 

 

해마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동네마다 반가운 이웃들이 모여 윷놀이를 한다. 한 해 농사 잘되게 해달라는 기원으로 시작됐다는 대보름 윷놀이.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활동하기 위한 준비운동으로 던졌다는 의미로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있다. 정월대보름날, 오랜만에 동네 형들과 아우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어린시절 개구지게 놀았던 추억을 이야기하며 한바탕 웃어젖힌다. 몸은 세월을 비껴가지 못하나 쏟아내는 어린시절의 추억들에서는 동심이 묻어난다. “지금 우리 나이가 오십, 육십 이러잖아요. 앞으로의 미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과거이야기만 하고 사는거지. 옛날 얘기하면 그때로 돌아가. 재미있잖아.” 호철씨의 음성에서 한껏 신남이 묻어난다.

 

마을별로 앞산에서는 안산시 원곡동으로 편입 된 때골과 도일의 아이들이 불 대결을 벌였다. 활에 불을 붙여 쏘는 게임인데 승부가 없는 놀이로 즐겼다. 그때의 개구쟁이 꼬마들이 지금은 50, 60대 중반이 되었다. 

 

 

 

담배 피우다 우리 집 뒷산 태우고

명기형! 그때 사고 친거 말해봐! 그때 형, 불냈었잖아~ 담배 피다 산 홀라당 태워먹은거!” “~ 안돼!!! 나 잡혀가! 안돼안돼! 이거 공소시효 끝났냐?” 느물거리는 말에 큭큭 대고 웃는 친구들이 영락없는 아이다. 마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수다스런 옛날이야기는 생생하게 전개된다. 호철씨의 이야기가 신명나게 전개되기 시작한다.

 

내가 얘기해줄게요. 옛날에 성냥 있잖아요. 유엔성냥... 여기 명진이 형이 장가를 가는데 청첩을 우리 보고 돌려 달래. 그래서 이 사람도 돌리고, 여기 교감도 돌리고 했는데, 다 돌리고 나니까 담배가 피우고 싶잖아. 근데 성냥이 한 개비만 남은거야. 꺼지면 안되니까, 이걸 불을 살려서 담배를 피려고 쭉 빠는데, 그 찰나에 바람이 휙 불어서 순식간에 번진거야. 난리가 났지. 관련자들 다 잡혀갔어. 거기가 여기 아주아파트야. 뒷산, 거기가 우리 산이야. 그리고 재완이형네 산이기도 하고, 우리 산하고 붙은거야. 불이 막 퍼지는데 겁이 나잖아. 도망갔지. 그때 군자중학교 앞에 버스가 하나 있었어요. 버스를 타고 군자파출소를 넘어오는데 경찰 둘이 타더라고. 그때는 경찰들이 총을 갖고 있었어. 얼마나 놀랬겠어. 잡혀갈까봐 집에도 못 가고. 초등학교 담장아래 꼼짝 않고 쭈그리고 앉아서 숨어있었다고. 어우~ 근데 저녁때가 됐는데 종완이 형이 우릴 찾아내서 보더니 대뜸 너 불냈지?’ 하는거야. 그 형은 그런 사실도 모르고 그냥 말한건데... 제 발 저린거지 뭐. 많이 혼났어요. 그 주범이 여기 이 친구 교감선생님이예요.” 얘기하는 중간중간 그랬지, 맞아 맞아~ 하며 추임새를 넣는게 재미있다.

 

형이 겁냈지! 난 겁 안냈어.” 현 학교 교감선생님이기에 이야기할 때 숨는 모습이 더 익살스러웠다. 강호철씨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학교에서 껐다더라고요. 그때가 아마 15,6세 때였지? 지금 같으면 동네에 불이 다 번지는거야. 나무는 있어도 지금같이 낙엽이 없어요. 다 긁어서 때니까(땔감이 없으니까) 불이 덜 번진거야. 지금 같으면 절대 사람 힘으로는 못 꺼요. ~ 빨자~ 하고 담배 한 모금 빠는데 바람에 불이... ~~” 킥킥대고 웃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아버지 산소도 태워...

그들은 점점 코흘리개 개구쟁이들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버님 산소 태워먹은거 얘기해야지! 아버님 산소 홀랑 다 태워서 잠바 벗어서 끈거. 그때 형 도망갔잖아, 탁구부 선수라고 탁구부 짤린다고.”

, 여기 형님 계신데 그때 얘기하면 또 승질 내과수원까지 태울 뻔한 불은 형님에게 무지하게 맞고 또 다음날 학교에서는 선생님으로부터 도일 사는 친구들 다 일어나!’하여 모두 벌을 섰다. 점퍼도 산지 이틀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불을 끈 용도로 사용해버렸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대보름시기에는 날씨도 건조하고 물때가 되면 바람이 많이 불어요. 그때 치한이 형이 초등학생이었지? 탁구부 선수였다고, 그 양반이. 그때 자기가 학교에서 탁구부선수라고, 짤린다고 도망간거예요. 근데 이 형은 자기 아버지 산소니까 울면서 잠바를 벗어서 끈거야. 산지 이틀 된 잠바를 벗어서.... 산소가 막 타고 과수원으로 불이 막 넘어가려는 거예요. 불끄는데는 솔가지가 최고거든. 근데 그 생각이 나나? 불 끄는데 급하니까 잠바를 벗어 끈거지. 아이고 학교에서 난리났지요. 그 산소가 군자초등학교 뒤에 있었거든.” 아버지 산소를 태울 수 없으니 급한대로 점퍼를 벗어서 꺼야만 했던 어린 심정은 오죽했을까 싶다. “옛날에 묘지를 태우면 두 번 죽인다는 말이 있었어요. 그래서 엄청 혼났지. 지금도 그때 얘기하면 형이 막 승질내요. 그때 진짜 많이 맞았어....”

 

산소는 타고 잔디를 살려야했다. 짚단을 작두에 대고 잘랐다. 썰어서 소 여물 주듯이 산소에 뿌렸다. 불나고 나면 뙤(‘잔디의 방언)가 더 잘 산다고 한다. 봄 되면 새싹이 더 예쁘게 돋아난다 고하여 열심히 뿌려댔다. 웃으면서 얘기해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하다고 한다.

 

동네 형들과 멀리 외지에 나가 사는 친구들도 정월대보름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하나씩, 둘씩 모여들며 반가운 인사를 한다.

 

? 형님 오시네, 우리 자랄 적에 같이 다니던 제일 큰 형님인데 이 형님이 우리 어릴 때 목숨 살려준 은인이야. 우리 여기 있는 친구들 7명이 저수지에 빠졌었는데, 다 건져줬거든.”

1명도 아닌 7명을 건졌다고 하니 그 사연을 들어보기로 했다.

    

 

 

염전저수지에 빠진 일곱 아이들, 죽었다 살아난 호영이

아이들이 빠진 곳은 염전 저수지 갯고랑자리다. 만조 때가 되면 수문을 열고 물이 들어오면 수문을 닫는다. 받아진 염전저수지의 물이 증발되면 일주일 후 높은 염도의 소금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동네 꼬마들이 들어가 노는 바람에 사고가 난다.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저수지 가에를 파놓았다. 7명의 아이들은 그곳에 빠져버렸다.

 

형들은 낚시를 하고 있었고 친구들은 술래놀이를 하고 있었다. 물이 들어있을 때 바닥이 보이지 않으니 한 발 한발 뒷걸음질 치다 갑자기 빨려들어가버린 것이다.

 

저수지안으로 들어갔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보이지 않고 술래였던 호철씨가 마지막으로 빠졌다. 그때를 상기하는 호철씨의 표현에 의하면 뒤에서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났는데, 난 물먹는 소리가 그렇게 나는건지 처음 알았다니까.”

 

형들이 한번에 2.3명씩 매달고 양팔에 끼며 건졌다. 다 구조된 지 알았는데 호철씨의 동생이 없었다. 14개월 터울의 동생은 저수지 바닥에 가라앉아있었다. 울면서 형님! 내 동생 호영이가 없어요!”하니 다시 들어가 건져왔다. 동생은 호흡이 없었다. 죽었구나 했다. 사람들도 다 죽었다고 했다. 거적을 덮고 느티나무 아래에 눕혔다. 옛날에는 죽어가는 사람을 느티나무 밑에다 놓으면 호흡을 한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70세 연세에 자식을 낳은 아저씨의 지혜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지금 수자원공사자리에 있던 느티나무다. 일부 아이들은 호영이가 죽었다고 알리러 갔다. “해가 뉘엿뉘엿 할 무렵이었을거야. 죽었구나 하던 차에, 갑자기 얘가 꿈틀!꿈틀! 거리는거야. 살아난 거지그 순간 울컥했는데 애가 살아났으니까 이번에는 할아버지에게 혼날일이 걱정되었다. 방학 중에 놀러 내려온건데 그 난리를 쳤으니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군자초 부근에 있는 두레박 우물 뒤에 숨었다. 할아버지가 회초리 들고 큰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겁에 질려있는데 횃불 든 누이가 발견을 해서 괜찮다고 하여 나왔다.

 

그때 내가 3학년이고 호영이가 2학년이었어.” 형들 중에는 한살 터울의 족보상 아저씨도 있었다. “건철이형과 경희형이 모두 구해주었는데, 우리 아저씨는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줄 생각은 않고 낚싯대만 쭉 내밀고는 잡으라고 하는거야. 급하니까 잡긴 잡았지. 지금도 그때 얘기를 하면 미안해미안해”. 옆에서 한 친구가 대꾸한다. “, 근데 난 왜 기억이 없냐?”하니 넌 살았으니까 기억이 없지!” 초딩스런 대화가 화기애애하다.

    

 

 

동생들을 구해준 형님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다. 조경희(72)씨는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동생들을 빨리 건져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않았다고 한다. “그때 내가 열일곱이었던가, 열여덟이었던가...” 물에 빠지면 힘이 좋아지는 사람을 건져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더 힘이 좋았던 조경희씨는 동생 일곱을 모두 건져냈다. 호철이, 호영이, 명덕이, 건수등등....

 

낚시질을 하고 있는데 저기서 뭐가 떠서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난리를 치는 거야. 뭐지? 하고 보니까 애들이 빠진거야. 그래서 윗도리만 벗고 뛰어 들어갔지.”

 

지금 같으면 의인이라고 하겠지만 당시에는 이웃동생들은 형들을 따르고 형들은 동생들을 보살피는 게 당연한 것이어서 어른들도 그저 믿거라 하던 때였다. 형들은 어린 동생들을 잘 데리고 놀아주었다. 그 중에서도 자치기놀이는 빼놓을 수 없는 놀이였다.

    

 

 

! 잡아!” 형들과 함께 자치기놀이

이게 탁 치면 한 30m 날아간다고! 그럼 형들이 야! 잡아! 하면 쫒아가서 맨손으로 잡는 거야. 지금 같으면 손이 나갈 거야.” 추위에 언 손을 뻗어 날아가는 막대를 잡아야 하는건 어린 동생들의 몫이었다. 땅에 떨어지면 아웃되니 기를 쓰고 달려 잡아야했다. 나무막대를 양쪽을 깎아 긴 막대로 툭 치고 튀어 오르면 있는 힘껏 쳐서 멀리 나가게 하는 놀이. 세 번을 칠수 있는 놀이는 지금의 야구와 비슷하다. 공을 이용한 것은 찐뽕이라 했다. 이 대목에서 주름진 개구장이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여 몹시 시끌벅적했다. 마치 도떼기시장에 온것처럼.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니 수다장이들이 된다.

    

 

긴 기억, 짧은 이야기

전시의원이던 이건수씨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지금의 신길온천역 선로 아래로 짠물이 들고 나갔다. 지금의 그 선로 그대로다. 예전에는 석탄으로 움직이는 수인선 기차가 다녔다. 수원에서 남인천까지 연결된 선로(지금은 송도역까지)위로 소금과 모래를 싣는 흔히 방통차라고 불리는 칸이 연결되어 있었다. 군자동에서 나고 자란 이건수씨는 3년간 인천으로 통학하며 방통차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군자면 학생들은 인천공고, 인천선인고, 부천고로 다녔다. 군자고(지금의 군자공고)에 다닌 학생들은 소수였다.

 

다음 칸으로 가려면 역에서 내려 올라타야 했던 칸막이 없는 기차. 기차는 워낙 작아서 시골 사람들이 여름에 농사지은 채소를 싣고 배다리시장으로 경매를 팔러 다녀 늘 복작거렸다. 학생들은 칸 사이, 지붕으로, 소금 싣는 방통 칸으로 올라타며 다녔다. 지금의 송도 용현역 언덕받이 근처에는 산 밑에 더러의 집이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당시 국민학교 아이들이 기차에 매달려 장난치다 선로에 떨어져 두다리가 절단되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하기도 했다.

 

 

 

보릿고개 때는 신길온천역 앞 터진목(가 내리면 둑이 자주 터져 지어진 지명)에 가서 굴도 따먹고 고기도 잡아먹었다. 건철이 형과 경운기를 끌고 가 물고기들을 실어내며, 매일 끼니때마다 장어를 석점씩 먹어 나이 70에 애를 낳았던 아저씨 이야기까지를 꺼낸다. 참외서리, 포도서리, 닭서리로 배를 채우기도 하며, 지나다니는 길에 만나는 밭에서 고추, 가지도 딴다.

    

 

 [그림 윤원진 작가]

 

너털거리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이들. 예전엔 모두가 형님이고 아우고 친구였지만, 지금은 50년 이상의 세월을 한동네에서 살아가니 세월의 빠름을 실감한다. 한편 쓸쓸한 마음도 있지만, ‘과거를 먹으며 지금을 사는가처럼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모였으니 좋다. “이제는 같이 늙어가는거야. 그렇게 세월이 흘렀어.”

    

 

 

[시 전영준작가]

 

*글.사진:허정임/삽화.켈리체:윤원진/시:전영준

 

* [소담소담군자옛이야기 수록] 글과 사진의 저작권은 군자동행정복지센터에 있으며 동의하에 '아름다운 시흥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블로그에 포스팅함을 알립니다. 책을 받아보시고 싶으신 분은 군자동행정복지센터에서 무료로 신청하세요. [문의:031-310-44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