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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마을이야기

이희선동장의 군자동일기 9대동장 이희선과장은 임기 2년 남겨놓고 명예퇴직을 했다. 이유를 물었다. “욕구, 욕망, 욕심은 패망의 3요소다. 후진 양성을 위해 선대가 자리를 마련해주어야한다”는 평소 소신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시니어클럽에 가입해서 정왕동 그린센터 계근실로 배속받아 출입차량 계근 및 내방객 안내 일을 하고 있다. 퇴근 후 찾는 농장은 그의 인생 후반기 안식처다. 흙이 있고 막걸리 한잔 할 수 있는 벗이 있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그는 퇴직 후의 삶을 정년퇴임 10년 전부터 준비했다고 한다. 시청에서 보았던 말끔한 신사의 모습은 없었다. 겨울이라 앙상한 가지 속 숨결을 손끝으로 느끼며 구찌뽕 나무를 손질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농부의 모습이었다. 그는 농장 한 켠 놓아두있던 두꺼운 노트 3권을 건네주었다. 군자동에서 .. 더보기
공연택 군자동 5대동장 1998. 10. 16. ~ 2000. 07. 03. 공연택(68세, 5대동장)동장은 76년도에 공무원을 시작했다. 첫 부임지인 화성시를 거쳐 시흥시에는 95년도에 들어와 2009년에 퇴임했다. 공연택씨의 기억에 남아있는 군자동은 지역주민들의 단결심이나 애향심, 그리고 자부심이 강한 동네라는 것이다. 간혹 와일드한 면도 있지만 바닷가가 가까워서 어업이나 염전, 자연재해등을 겪다보니 아픔이 생겨 생활력이 강해진 부분이 있는 것 같다고 한다. “군자동, 목감동, 신현동, 정왕3동, 정왕4동... 제가 좀 많이 다녔습니다” 그 중에서도 군자동이 더 마음에 남는 것은, 주민들이 동을 위하고 예우를 해주는 부분들이 타동보다 월등한데 이는 강한 애향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연택씨는 본청보다 동주민센터가 일하기에 좋다고 한다. 실질적인 일을 해야하고 주어진 테두리.. 더보기
김영호씨의 ‘엄마 없는 하늘아래’출연기 1977년, 전 국민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엄마 없는 하늘아래’라는 영화를 기억하시나요? ‘엄마 없는 하늘 아래’는 이원세 감독, 김문엽 각본, 염재만 원작으로 제작된 대한민국의 극영화입니다. 대강의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13세의 김영출군은 어머니가 막내 동생 철호를 낳자마자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뇌를 다친 것이 재발되어 정신착란까지 일으키게 되자 어린 나이에 집안을 책임지는 소년가장이 된다. “ 내 동생 철호가 배고파 웁니다. 철호가 울면 나는 …… 돌아가신 엄마 생각을 합니다. 철호를 어찌할까. 먹을 것이 없는데 어찌할까. 하다가 나도 같이 웁니다. ” 어린 영출군이 쓴 일기장을 모자 보건원 여직원이 보고 군청에 지원을 요청했고, 서울신문사의 기자가 이것을 보도하여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가 .. 더보기
‘굉장’했던 도일5일장, 어린시절은 60여년을 거슬러.... 장곡리에 살다가 도일시장 골목에 들어온 것은 초등학교 5학년때였다. 그리고 69세가 된 지금, 아직도 그는 그 자리, 그 집에 살고 있다. 이태환씨의 기억 속 도일시장은 말 그대로 ‘굉장’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지 지나칠 때마다 몸이 부딪힐 정도였다. 어린 태환씨의 눈에는 시장 자체가 거대한 놀이터였다. 지금도 장날에 들어오는 센베과자는 그 당시 최고 인기 과자였고, 장날 때나 얻어입을 수 있는 옷은 5일장을 기다리게 만들었다. 그의 집주변은 싸전이었다. 쌀가게를 운영하던 어머니는 쌀 100가마를 쌓아놓고 파는 거상급 장삿꾼이었다. 군자염전에 큰 차로 하나씩 갖다 놓았다고 하니 그럴만도 하다. “군자 5일장? 대단했죠. 어릴 때는 여기 사는게 복을 받았다고 느낄 정도로 장사도 잘 되고 사람도 .. 더보기
고인이 된 역리학자 지창용 군자면 구준물 출신, 풍수지리학의 대가 지창용을 아는 사람이 몇 있을까... 그는 공학과 정치학을 공부한 풍수지리학계에서는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생활권이 타지에 있던터라 고향에서의 생활은 길지않았지만, 군자초등학교 총동문회장을 지내며 적지않은 업적을 지역에도 남겨놓았다. 중앙일보사에서 발간한 소설 ‘풍수’와 정을병씨가 쓴 ‘제3공화국’에 등장하는 모델이 지창용이라는 인물이라면 놀라울까..? 대통령 이승만과 대통령 박정희의 부름을 받아 그들이 원하는바를 도와주며'국사(國師)'라는 칭호를 받았던 풍수지리가 지창용씨. 그의 이웃으로 살았던 이는 어떤 기억을 하고 있을까? 주민 한정연씨를 만나보았다. 1968년도인가.. 아마 그 정도 됐을거예요, 새마을사업이 있었던 때가. 마을회관 짓는거라든지 군자중학교 동네 .. 더보기
100년 된 가옥, 사미마을을 지키고 있는 양태환씨. 양태환(사미마을출생, 59세)씨는 20여가구와 공장이 들어선 마을 중간, 100여년 된 낡은 가옥에서 홀로 마을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2009년도에 작고하신 양태환씨 아버님은 23년생으로 살아계셨으면 96세쯤 되셨으려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시던 집에서 그의 형제 여섯(4남 2녀)은 복닥거리며 살았다. 3만 2천평, 사방이 논이었던 마을은 폐가와 더불어 을씨년스런 분위기로 바뀌었다. 추진되었던 개발은 멈춰버렸고 흘러가버린 20년 세월동안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현재 몇몇 주민들만이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살고 있다. 많지 않은 집에 도심 속의 시골풍경을 간직했던 사미마을. 불과 3,4년 전까지 그나마 있었던 집마저 허물어지면서 동네는 그야말로 황폐해졌다. 양태환씨가 살고 있는 집은 볏집으로 이은 지붕의 흔.. 더보기
장경창선생님께 듣는 군자(君子)산=백산(柏山)이야기 [장경창선생님] "장곡리(장곡동), 장현리(장현동), 월곶리(월곶동) 3개리는 군자면에서 북쪽에 있어 북삼리라 불리웠는데, 북삼리 사람들은 군자봉 앞 황고개 넘어 가는 길이 힘들었어. 중학교가 거모리(거모동)에 있어서 멀어도 다녀야지 별 수 있나? 그런데 해가 떨어지면 깜깜해서 꼼짝을 못하고 뛰어다녀야 했지. 낮에도 으슥했으니까.. 귀신이 나온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때는 군자봉을 중심으로 마을사람들이 아주 열심히 살고 있던 때였지." ※ 택시기사님의 기억도 살짝 끼워넣는다. 안산에서 택시를 탔는데 황고개길을 넘어오면서 택시기사님이 하신 말씀이다. "여기 황고개... 택시하면서 많이 넘어다녔죠. 그때는 차가 없었잖아요. 길도 비포장이고. 어두웠다고요, 여기가. 누가 잡아가도 모르고 누가 죽어도 .. 더보기
한씨가문 자랑? 나! 내가 남았으니 내가 제일 잘났지! 군자동 새미마을. 거모4통. 미군부대가 있던 곳. 송암동산과 미사일 부대가 나란히 있는 곳. 작은마을이지만 굉장한 마을이다. 수백년의 깊은 역사마저 깃들어있으니 만만히 볼 마을은 아닌듯하다. 한상소씨는 1952년 새미에서 태어나 13대째 살고 있는 잘난(?) 토박이다. 새미마을은 청주한씨의 집성촌이다. 그 역사만 400여년이다. 지금이야 다양한 성씨의 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있지만, 옛날에는 한씨 가문만 살았던 동네다. 70을 바라보는 동안 많은 일들을 겪었고 많은 마을의 변화를 보아왔다. 겹겹이 쌓여온 세월은 지워두고 지금은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이웃과 더불어 즐거운 삶을 보내고 있다. 특별한 직업은 없다. 운동하면서 통장일을 보는 것이 인생의 낙이다. 그래서 그런지 70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단단해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