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태환(사미마을출생, 59세)씨는 20여가구와 공장이 들어선 마을 중간, 100여년 된 낡은 가옥에서 홀로 마을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2009년도에 작고하신 양태환씨 아버님은 23년생으로 살아계셨으면 96세쯤 되셨으려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시던 집에서 그의 형제 여섯(4남 2녀)은 복닥거리며 살았다.
3만 2천평, 사방이 논이었던 마을은 폐가와 더불어 을씨년스런 분위기로 바뀌었다. 추진되었던 개발은 멈춰버렸고 흘러가버린 20년 세월동안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현재 몇몇 주민들만이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살고 있다.
많지 않은 집에 도심 속의 시골풍경을 간직했던 사미마을. 불과 3,4년 전까지 그나마 있었던 집마저 허물어지면서 동네는 그야말로 황폐해졌다.
양태환씨가 살고 있는 집은 볏집으로 이은 지붕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오래 된 만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집은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버티고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100년은 된 거 같아.”
집은 위험해보였다. 기왓장이 바람에 날아가고, 기둥으로 버티고 있는 나무들은 눈, 비를 맞아 썩어있었다.
“박정희대통령이 그 전에 새마을 사업으로 길을 넓히고 볏짚 엮어 해놓은 초가위에 슬레이트 지붕을 씌웠거든.”
“여기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그때 양색시들이 살던 집이지.” 미군 사모님들이 세를 놓기도 하고 집 가진 자들도 방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다. 미군부대가 있어서 나름 장터가 형성되어있어 마을의 밤은 불야성이었고, 나름 돈벌이도 되었다. 클럽이 많았는데, 미군들만 받는 클럽이 있고 미군과 한국사람들을 함께 받는 클럽이 있었다.
외지에서 사람들이 들어오면 술 마시고 당구 치며 놀고 가곤 했다. 70년대, 미군부대가 있던 사미마을 일부 주택과 양색시들이 기거하던 방의 형태는 방마다 호수가 적힌채로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당시에 슈퍼나 면세점에 가면 달러와 한국돈이 통용되었다. 당시 1달러는 500원 정도의 가치였다. 이 동네 저 동네에서 주거니받거니 하면 570원 정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미군들을 상대로 미국 물건을 파는 장사를 하고 미군부대 관련된 일을 하면서 돈을 잘 벌었다. 지금은 낙후되어있지만, 최초 동네 형성의 이유가 다르기에 활기찬 분위기가 있었다.
다른 동네에 비해 생각이나 행동이 약간 세련되었다고나 할까. 마을은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다. 무엇보다 미군들로 인해 신문물을 제일 먼저 접하기에 생각하는것이나 생활하는 방식이 다를 수 밖에 없었다.
큰형과 작은아버지는 미군부대에 다녔다. ‘하우스보이’로 일했는데 미군부대에서의 잡일이었다. 70년대에 결혼한 형은 그대로 미군부대에 다니고 형수는 결혼하자마자 여기서 미장원을 했다. 미장원이 하나였기에 꽤 벌이가 좋았다. 간판은 달지 않았지만 양색시들, 동네 사람들의 이용이 좋았다. 지금은 허물고 없다. 아버지는 염전에 다니고 둘째형은 군대를 갔다. 셋째형도 염전 다니다 안양에 있는 공장으로 취직해서 나갔다. “나는 여기서 군자국민학교를 다녔지” 비가오나 눈이오나 10리(4킬로 정도) 정도 되는 길을 매일 걸으며 다닌 학교다.
간혹 미군부대의 화물차를 타고 나가기도 했다. 아이들한테는 인심이 좋아 덕을 많이 봤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면 동네사람들을 초청해서 파티를 열어주기도 했다. 빵, 과자, 치킨, 껌, 초콜릿등등.. 아이들은 그저 신이 났다. “도일쪽에 있는 애들은 구경도 못한 것들이지, 허허허” 돈 넣으면 나오는 자판기도, 팝송도 음료 캔도 빨리 접했다. 그래서 도일친구들이 넘어오면 “도일 촌놈들 왔냐~”하고는 했다.
마을에는 일찍부터 전기가 들어오고 가로등과 도로가 깔렸다. 미군부대, 포대, 공군부대로 이어져 군인과 함께 살아가는 마을. 그리고 송암동산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마을. 새미마을은 옥녀봉 아래 그냥 그렇게 어울리지않을 것 같은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글.사진:허정임
* [소담소담군자옛이야기 수록] 글과 사진의 저작권은 군자동행정복지센터에 있으며 동의하에 '아름다운 시흥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블로그에 포스팅함을 알립니다. 책을 받아보시고 싶으신 분은 군자동행정복지센터에서 무료로 신청하세요. [문의:031-310-4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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