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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W! 시흥 人!

이상기의 글로 보는 다큐-1부

“이리 들어와, 국수 해줄게”

 

어린시절의 우리집은 사람들로 늘 북적였어요. 엄마는 소담스럽게 국수 한 그릇 말아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몹시 좋아했지요. 정성껏 만들어 맛있게 먹어주면 그냥 좋아라 하셨어요. 보고 배운게 그건가.. 지금 제가 그러고 있답니다.”

 

대야동소재 시흥체육관 지하 식당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다. 2020, 전세계를 강타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는 지하 식당에도 영향을 미쳤다. 최소한의 봉사자들로만 움직여야 한다는 것과 찾아가는 나눔봉사의 일시정지는 안타까움을 넘어 야속함을 주었다. 나눔도 좋지만 봉사자들의 안전도 책임져야하기에 최소의 인원으로 가동시키는 나눔현장은 그래도 365일 끊이지 않는다.

 

30년 식탁 위에 녹여낸 삶은...

독거어르신 식사대접, 재난재해구호활동, 해외자원봉사 등 자원봉사 전 영역에 걸쳐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주력하고 있는 봉사는 반찬나눔이다.

 

우리음식은 식재료 손질부터 조리까지 손이 많이 간다. 매일 최대 500인분까지 만들어내는 반찬은 가짓수부터 양까지 어마어마한 기록을 수시로 갱신한다. 30여년을 하루같이 해 온 반찬나눔, 나눔자리문화공동체대표이상기씨의 온전한 삶 속에 있다.

 

 

1961년생인 이상기씨는 시흥에서 봉사하면 이상기하고 바로 떠올려질만큼 봉사의 달인으로 이름이 나 있다. 30년 봉사 세월은 2011년 시흥시 제1호 명예의전당에 올렸고, 시흥시자원봉사센터에 등록되어있는 봉사자 중 누적 봉사 공적의 기록으로 시흥시청 1층에 영광스런 흉상을 전시하게 했다.

 

 

30년 봉사. 거저 지나간 세월일 수 없다. “봉사를 왜 그렇게 하세요?” 우문이지만 담담하게 답한다.

친정엄마의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어린시절의 집안 분위기

이상기대표의 어릴적 집은 경기도 이천, 도농복합지역의 시골이었다. 지금의 시흥과 다를바없는 분위기여서 시흥에 정착하며 사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고 한다. 시골 마을은 대부분이 농가였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덕에 농사를 짓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넉넉한 형편도 아니었다. 엄마는 또래 아이들에게 국수 말아주는 것을 좋아했다.

학교에 갔다 오면 엄마가 국수를 해줬는데 난 그게 창피했어요. 우리 또래가 12명 정도 됐거든요. 친구들이 다 잘 살았어요. 우체국집딸, 주유소집딸. 쌀집딸... 다 부잔데 우린 아니니까... 그런데도 친구들은 우리집에만 와요.”

 

왜냐고 물었다. 다른 집에 가면, ‘발냄새, 땀냄새 나는데 왜 오게 하느냐?’ 하더란다. 그러나 친정엄마는 개의치 않아했다. 발냄새가 나던 땀냄새가 나던 무조건 들어오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볼일 없는 한 끼였는데 뭐가 그리도 맛있었을까...? 손으로 빚어 만든 칼국수에 양념장 하나, 김치 하나가 전부였는데. 그것을 친구들은 맛있게 먹었다. 엄마는 아이들이 맛있게 먹어주니 좋아했다.

 

동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농사일 마치고 오며가며 잘도 얻어드셨다. 아니 엄마가 잘도 해 먹이셨다. 그러다 엄마가 돌아가시고나니 드나들던 친구들이며 동네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 한동안 동네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같은 말을 해댔다. ‘이제 얻어먹을게 하나도 없다.’.

 

베푼다는 것, 나눈다는 것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여운을 주는가 보다라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내성적이던 어린 시절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던 것은 그때 받은 엄마의 영향이 컸지 않았나 싶습니다.”

 

공직자였던 친정아버지는 정직했다. 연필 한자루와 바꿀 정도의 가치가 있던 비료포대 한 장도 남의 것이라면 함부로 손을 대지 않았다. 또 남의 집 사과나무의 사과가 내 밭에 떨어져도 주인 허락 맡고 먹으라고 했다. 그러기에 동네사람들이 외부 일을 볼 때 동네를 맡길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다고 인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버지는 정년 퇴임 후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셨다.

봉사든 사회생활이든 정직해야한다!는 이상기씨의 일관된 신념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신념이라하면 누가 뭐랄 사람이 있을까? 늘상 하는 이야기지만 일은 흐름에 따라 하면 되니 조금 서툴러도 된다. 그러나 봉사는 좋은 마음으로 해야 하기에 화가 들어가면 안된다는 것 또한 신념에 들어있다.  나눔 또한 마찬가지다. ‘누굴 도와주었으니 인정을 받아야한다는 마음이 있으면 서운함이 생기기 마련이다. 봉사자도 사람인지라 상대가 조금만 섭섭하게해도 이건 아닌데...’하고 속상해지는데 그런 마음은 누굴 도움으로서 받는 '힐링'이 될 수 없다. 나눔으로서 물질로 받는 것이 아닌 마음의 힐링, 즉 나만이 받는 내 마음의 위안과 보람, 그런 것으로 윈윈이 되는 상호작용. 섭섭한 것이 있어도 뭐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한다면 서운함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상처를 받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받는 여린 사람

제가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사람이 같은 말을 계속하면 상대방 얘기를 듣지 않고 오해하는 부분들이 있잖아요. 그런게 좀 속상했죠, 나도 사람인데... 봉사를 하면서 어디 좋은 일만 있었겠어요?”

 

2017년 백년정원에서-몸빼바지 입고 검정고무신 신고 있는 그녀

 

이상기씨의 봉사 여정길

결혼 전, 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후부터 레지오마리애 활동을 했다. 레지오마리애는 성당에서 운영하는 봉사단체다. 청년레지오의 시작은 20살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세례명 안토니아. 안토니아의 봉사는 청년레지오에서 익숙해져갔다. 청년레지오로 할 수 있는 봉사는 참으로 다양했다. 젊었기에 할 수 있는 봉사가 많았다. 친정엄마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반찬 만드는 일에 관심이 더 기울여졌고 또 그런 기회들이 주어졌다.

 

우리 동네 신부님이 어렸을 때부터 반찬을 실컷 만들게 해준다고 한식, 양식을 다 가르쳤어요. 그게 끊어지지않고 이렇게 해 오고 있는 거 보면 이게 내 길인가봐요

 

봉사활동에 익숙해져가던 청년 이상기는 26살 되던 해에 결혼을 했다. 봉사는 결혼을 하고 나서 두배로 늘었다. 남편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아들과 딸을 낳아 키우면서는 당시 절에 다니던 남편과 음성에 있는 꽃동네를 다니기 시작했다.

 

음성 꽃동네는 가족봉사의 첫 출발이었다. 절에 다니는 불자와 성당에 다니는 자매님이 마음을 합치니 봉사의 기운은 가히 위력적이었다. 그 기운은 어린 자녀들에게까지도 전염되었다. 성당의 소개로 가게 된 꽃동네에는 버려진 아이들이 많았다. 자폐아와 지능이 낮은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목욕을 시키고 밥을 짓고 먹여주는데 어린 은주가 제법 따라주었다. 은주도 봉사를 통해 마음과 몸이 다져져갔다. 몸이 약했던 은주는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봉사라는 삶의 현장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워나갔다. 스스로의 체득은 자연스럽게 목표하는 바를 세우게 했다. 당시 딸의 꿈은 수녀의사였다.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낯선 직업이기도 하겠다.

 

에피소드 하나...

은주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즈음 있었던 일이다. 학교에서 꿈이 뭐냐고 물어보았나보다. 은주는 수녀님의사가 될거라고 했단다. 아이들이 그런게 어디 있냐고 따져물었나보다. 은주의 대답은 당돌했다. 왜 이렇게 무식해? 수녀의사 있어! 성심병원에도 있고, 성모병원에도 있고. 너넨 그것도 모르니?” 팔삭둥이로 태어난 은주는 호흡도 좋지 않았고 황달까지 있어 성심병원, 성모병원을 다니며 입원 치료를 했던터라 그 곳에서 본 수녀의사들을 보고 꿈을 꾼 것이다.

 

엄마의 영향을 받은 딸 은주는 지역에서 청년봉사원을 발굴하며 지역사회와 함께 했다. 엄마와  딸의 교감은 늘 시흥봉사에서 나란히 한다. '이상기의 봉사인생'에서 딸 은주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그리고 이 글에 많이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죽음이라는 말을 입 밖에서 마주해야했던 그 때. 남아선호사상이 심했던 이유도 있겠지만 계집애를 낳아서 속썩이냐는 시어머니의 말은 비수가 되어 꽂혔더랬다. 사업을 하다 무너진 집안 사정과 생사의 기로에 선 아이를 안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눈물 흘리는 것밖에 없었다.

 

보험도 없었던 시절, 인큐베이터에 들어갈 정도로 작디 작은 아기 은주를 두고 남편의 사업이 망했음에도 잘 살던 시댁에서는 약한 계집아이라고 경제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다. 아이를 낳았던 조산원의 원장이 딱한 사정을 알고 도움을 주려했지만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탓에 선뜻 받지 못했다. 대신 아이를 데리고 집에서 할 수 있는 간호를 익혔다.

 

당시는 연탄을 땔 때라 방의 온도를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았다. 또 밝은 빛에 민감한 아기의 눈을 가려야 했다. 아이가 사용하는 모든 것도 삶아야했다. 연년생 아이를 돌보며 사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월세 사는 입장에서 먹고 살기 힘들다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의 생활이었다.근데 애가 살려고 했는지 힘들게 하질 않는거야.” 아팠던 아기 은주는 엄마를 많이 힘들지 않게 하려는지 보채지 않았다. 그나마 버틸 수 있는 힘을 준 것이라고 생각하며 고마워했다.

 

한참 지나서야 친정의 도움으로 겨우 숨을 고를 수 있게 되었고, 못 걸을 줄 알았던 은주는 두돌이 지나서야 겨우 걷기 시작했다. 우리 어머니가 매일 어디서 저런게 태어나서 속썩이냐고, 큰애도 못 키우게... 막 그랬어요. 아유 눈물난다..”

버텼다고 하는게 옳은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도 눈치가 빤해서인지 일찍 철이 든건지 뭐든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란다. 학교 다니는 내내 공부도 거의 1등만 해야 하고 만약 못하면 숨넘어갈 정도로 예민해했다.

 

그것은 지금도 똑같다. 그런 예민한 성격은 은주가 고등학교 1학년 쯤 되어서야 가라앉았다. 늘 말했죠. 은주야 공부는 좀 못해도 돼, 친구들간에 그리고 사람들간에 관계형성이 중요한거야.. 라고요. 뭐든 잘해야한다는 은주의 강박도 있었지만, 오빠 때문이기도 해요.”

 

바로 위 오빠도 in서울의 대학교에서 1등만 하던 수재였다. 좋은 머리에 뭔가가 많이 들어있긴 한 것 같은데 사람간의 관계형성이 원활하지 못했다. 어쩌다 상대방과 대화를 나눌 때 용어를 잘못 쓰면 바보 취급을 했다. 그래서인지 적응을 하지 못했다. 은주도 그렇게 되면 어쩌나 싶어 어릴 때부터 열심히 데리고 다녔던 것이다.

 

그래서 온 우울증

은주가 아프고 동생이 교통사고로 죽고 주말부부인데다 남편 사업도 여의치 않으니 우울증이 안 올 수가 없었다. 성당은 마음의 안식처였고 놓으면 안되는 끈이었다. 성당과 연계한 봉사는 마음을 맑게 했다.나와 은주를 버티게 할 수 있는 힘이 성당에 있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은주는 당돌하고 똘똘한 청년으로 성장하여 지역의 청소년, 청년들과 함께 지역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인적자원을 키워냈다. 또 본인도 지역사회에서 한 구성원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말 그대로 눈물로 키워 낸 아이. 그런 아이가 자라서 제 몫을 충분히 하니 엄마로서 그저 대견하고 뿌듯하기만하다. 무엇보다 꾸준한 봉사활동으로 다져진 봉사자로서의 내공과 신념이 확고해서 좋다. 은주는 지금의 나눔자리문화공동체를 만든 장본인이다.

 

 

2부에서 계속

 

[이상기의 글로 보는 다큐]는 이 블로그에서 5부작으로 이어집니다. 최근 LG의인상과 방송에도 초대되어 시흥의 '인물'이 되었지요. 이상기대표의 삶 속으로 들어가봅니다. 이 원고는 2020년 시흥시자원봉사센터의 의뢰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