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의 ’나눔자리문화공동체‘
시흥에는 97년도에 왔다. 작은자리(신천동 일원)에서 인연이 되어 절친이 된 신부님과 비닐하우스에서 딸기잼을 만들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팔아주었다. “내가 오토바이를 잘 탔거든” 상상이 가지않는다. 오토바이까지 탔다고하니 역시 씩씩한 이상기대표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소시장이라 일컫는 뱀내시장이 있었다. 당시 뱀내시장에는 돈 많은 사람들이 많아서 팔기에 좋았다.
그리고 신천동...
‘작은자리’라 불리웠던 곳에는 비닐하우스촌이 많았다. 공동화장실을 사용해야하는그야말로 깡촌이었다. 故제정구의원이 오갈 곳 없는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와 형성한 ‘작은자리’는 비록 깡촌으로 시작했지만, 살고자 하는 의지로 살아낸 그들은 지금의 신천동과 은행동을 가꾸어냈다. 그리고 제2의 고향이 되었다. 그들의 자녀들은 고향이 되었다. 그들과의 첫 인연이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으니 첫 시작은 역시 ‘반찬나눔’이었다. 작은자리 인근 비닐하우스에 살던 빈민촌 주민들과 일대일 결연을 맺어 일주일에 한 번씩 반찬을 해다 주면서 시흥에서의 반찬나눔이 시작 된 것이다.
청소년상담봉사도 겸하면서...
나눔봉사와 병행한 상담 봉사는 주로 청소년이 대상이었다. 청소년상담자격증을 취득하면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상담을 하는데 짧은 기간 동안의 상담에서 한계를 느꼈다. 상담사1기에 이름을 올렸지만, 주어진 시간 안에 문제 있는 아이들을 파악하고 변화를 시키기에는 역시 부족했다. 부족하다 느낀 상담을 10년간 유지하면서 의무가 아닌 스킨쉽으로 전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하게 머릿 속에 뿌리박혔다. 보여주기식인 학교에서의 상담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제대로 된 상담을 하고 싶다는 욕구는 결국 딸 은주에게 손을 내밀게 하였다. “은주야, 동아리 한번 만들어볼래?”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은주는 바로 동아리를 만들었다. 동아리는 엄밀히 말하면 나눔자리문화공동체의 전신인 셈이다. 비영리단체로 운영되고 있는 ‘나눔자리문화공동체(청소년봉사단체)’는 은주씨가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나눔자리는 어느덧 18년이 되었다. 나눔자리문화공동체의 청소년봉사단체에서는 지역의 많은 청소년들이 지역의 일을 도와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후배들을 양성하며 지역에 머물고 있다. 1년에 한번 또는 2년에 한번 시흥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모집을 하는데 상담과 돌봄, 봉사를 하고 또 청년정책을 내놓기도 한다. 단 한사람의 청년이라도 지역안에서 제 할 몫을 하고 선한 영향력을 준다면 그것은 온전히 시흥의 자원이 된다.
청년, 지역의 일꾼으로 키우기
나눔자리공동체가 10기가 되도록 유지되는 이유는 관계의 끈끈함 때문이고 서로를 생각하는 깊이 때문이다. 봉사자들을 모집하면서 5명의 선배 봉사자들이 면접을 보는데 직접 질문지를 만들어 왜 왔는지 봉사에 대한 개념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점수 때문에 왔다고 하면 뽑지 않는다. 6기를 제외한 나머지 기수들은 현재까지도 모임을 갖고 각자의 위치에서 성실히 살며 시흥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아이들은 자라나는 나무’라고 한다. 심어놓고 관심을 갖지 않으면 죽는다.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어야 한다. 영향은 선해서 아이들은 변화를 보인다. 그것이 1기부터 10기까지 지치지않고 해올 수 있던 동력이 되었음은 부인 할 수 없다.
그들은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정보를 교환하고 지역에서 도움이 될만한 뭔가를 만들어 도모한다. 그 아이들 중 한 명이 사업을 시작했는데, 사업이 잘 되어 사회에 환원한다며 취급하는 품목 중 신생아 기능성 옷 10박스를 보내오기도 했다. ‘나눔자리에서 나를 사람 만들어줬으니 시흥에 풀고 싶었다’고 말하던 청년. 눈물이 왈칵할 정도로 대견하고 감사했다. 그 옷은 시청에서 관리하는 쉼터로 보내지고 월곶동, 신천동 중앙산부인과, 적십자등에 골고루 보내졌다. 그 아이가 나눔자리 1기 회장이다. 안산으로 이사를 갔는데도 가끔 사무실에 와서 막 들어온 청소년들을 통솔하며 간식도 사준다. 이제는 어엿한 어른이 된 그 아이는 다니던 학교의 교장선생님이 ‘봉사가 좋긴 좋구나, 사람이 달라졌네’ 라고 칭찬할 정도로 훌륭하게 자랐다.
청소년을 품는다는 것은...
1기부터 10기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시흥의 청소년들을 만났다. 한 아이, 아이마다 소중하지 않은 아이가 없다. 그들은 고이고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지금 만나고 있는 아이들도 물론 소중하지만 그중 특히 기억에 남는 아이가 있다. 단지 돈이라는 것 때문에 대학에 못가게 된 여학생이다.
여학생의 엄마, 아빠는 사업의 실패로 생활고에 시달리다 헤어졌다. 두 자매만 두고 엄마는 남의 집에 일하러 가고 아이 둘이 생활을 했다. 당시 은행고등학교에 다니던 여학생은 대학에 합격을 하고 나서도 입학금이 부족해 대학 입학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기를 쓰고 공부하여 합격한 대학... 자기소개서를 은주가 도와주어 더욱 신경이 갔던 학생이었다.
“난 그때 시어머니가 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셔서 없었거든요. 병원 갔다 오니까 경찰이 오고 난리가 난거야. 얘네가 가방 안에 소주를 넣어와서 아주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마셨지뭐야.”
술을 마신 이유는 등록금 낼 돈이 모자라서인데, 어디에 말할 곳은 없고 괴로운 나머지 친구 동생을 데리고 와서 둘이 마신 것이다. “그때 은주가 그러더라고요. 이런 모습을 내가 본 걸 알면 애들이 다시는 못 올거다, 깨면 약 사먹이고 택시 태워서 집 데려다주고 갈테니까 집에 가 있으라고.” 그 말에 일리가 있다 싶어 모른 척하고 집에 갔다. 하지만 궁금해서 안절부절했다. 그날 밤 11시쯤 술이 어느 정도 깬 여학생에게 은주가 물었단다. 고민있냐고.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도와줄 테니 말을 하라고 물으니 입학금 때문이라고 털어놓더란다. 부족한 입학금은 백만원정도였다.
“그 아이의 고민을 전해 듣고 내가 나섰죠. 어디서 그 돈 못구해주겠냐며 기간도 남았으니 기다려보라고 일단 안심을 시켰어요. 그리고 말했죠. ‘스트레스를 받으면 술을 마실 수 있는데 밖에서 티내지 말라고요. 그리고 사람이 추할 정도로 술을 마시면 흉이 된다고도 했어요. 사람은 정직해야하니까 도둑질이나 사기를 치지 않으면 나는 언제든 도와주고 또 환영할거다.’라고도 했지요. 그 말이 몹시 고마웠나보더라고요.”
그 뒤로 동사무소와 협력하여 긴급구호로 도와주며 대학에 필요한 주변의 것들을 조언해주었다.
또 어른들한테는 인기가 좋지만 또래들에게는 소위 왕따를 당하는 청년도 있었다. 일도 잘하고 어른들에게 싹싹하여 호감을 주는 청년이었지만, 어릴적 가정에서 겪은 일 때문에 트라우마가 있는지 또래문화에서 사회성이 결여되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런 아이들을 품어야하는 것이 ‘나눔자리’이고 또 ‘우리사회’이기에 심리상담과 관계형성을 통한 사회관계망을 원활하게 확장시켜주려 노력하고 있다. 그 청년은 지역에서 참 봉사인의 모습을 보여주며 활발한 활동을 하며 많은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청년이 품은 시흥, 시흥이 품은 시흥청년
지금 기수 아이들 중 두 친구가 청년일자리로 일하고 있다. 중학생일 때 처음 만난 친구들이다. 둘 다 키도 크고 잘 생겼다. 그 중 한 아이의 이야기를 하려한다. 첫만남부터 성장과정을 지켜보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아이는 ‘그저 뿌듯함’이다.
그 아이는 사무실에 오면 냉장고가 불이 날 정도로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눈에 거슬렀다. 행동을 주시했다. 아이들의 반복되는 모든 행위에는 이유가 있다. 그렇다고 문제적 행동에 대해 섣불리 물어볼 수 도 없었다. 그럴 때 또래 교감이 잘되는 은주가 있어 은주카드를 썼다. 그 아이는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새엄마랑 부딪히는게 싫어 올라와 할머니 밑에서 살았다. 밤늦게까지 밖을 돌다 들어가기 일쑤였던 그 아이는 정상적인 부모라고 볼 수 없는 가정환경에서 자라고 있었다. 부모라는 이름의 어른들은 어른이지만 어른이 아니었다. 심지어 새엄마가 데리고 온 딸도 있었다. 마음 둘 곳 없는 헛헛한 마음이 냉장고 문을 열고 닫는 행위로 드러내보인 것이다.
그러나 깊은 관심과 대화를 나누어보니 아이는 부모보다 어른스러웠다. 비록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지만 동생에게도 잘했다. 오빠로서의 책임감도 있었다. 어느날 동생에게 ‘너나 나나 부모 잘 못 만나서 그런거니 우리 약속하나 하자. 내가 너를 가르칠테니까 너가 졸업하면 그때 네가 나를 가르쳐라’라고 했다 한다. 동생은 치대를 다니고 그 아이는 한양대 4년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녔다. 생각이 깊은 아이였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학생회장을 할 만큼 적극적이었고 한편으론 기를 쓰고 공부하여 오로지 성적으로만 기숙사에 들어가기도 했다. 높은 성적을 보였기에 담임교사의 케어가 혹독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말에는 봉사를 해야한다며 학교 밖을 뛰쳐나오곤 했다. ‘내게서 힐링의 시간을 뺏지말라’며. ‘성적만 떨어지지 않으면 되는거 아니냐’며. 담임교사는 당연 할말이 없었다. 성적을 유지한다는데 더 뭐라 할말이 있으랴~ 그리고 그 아이는 당당하게 한양대학교에 들어갔다.
그 아이는 지역에서 아주 중요한 청년 일꾼으로 밝은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열심히 사는 남매를 보면 도와주고 싶고 울타리가 되어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지만, 한편으로는 아직도 본인들 쾌락에만 집중하는 철없는 부모들을 보면 속이 문드러짐을 지울 수 없다. 어쩌지 못하는 것이 혈연이라고 알량한 부모의 끈을 놓지못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약한 아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그 아이가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하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아이라서...
요즘도 일이 끝나면 사무실에 와서 사무실 일을 도와준다. 또 편의점 알바하는 아이들 대신 일을 봐주고 매사 부지런하고 성실한 삶을 산다. ‘나눔자리문화공동체’에서는 일년 행사 중 가장 큰 행사가 ‘청년청책포럼’인데 그때마다 참석하여 현장 셋팅을 도와주고 또 사회도 봐준다.
정말 보기만해도 뿌듯함으로 남는 아이다. 지역이 키운 그 아이는 그렇게 건실한 청년으로, 지역의 자원으로 자랐다.
힘의 원천 나눔자리문화공동체(청소년봉사단체)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힘들어서 어떡해요~’ 그런데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말한다. 스트레스도 풀리고 오히려 에너지가 생긴다고 말해준다.
그래서 나눔자리는, 봉사하는 이상기의 힘의 원천이다. 나눔자리문화공동체(청소년봉사단체)는 젊은이들을 지역에서 키우는 일을 하는 지역공동체다. 기수별 청년들은 멘토링과 함께 지역의 아이들에게 공부도 가르치고 또래들끼리 반찬 만드는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인원이 20명이 넘어가니 사무실이 좁아 얼마 전 작은자리 쪽에 사무실을 하나 얻어 내보냈다. 지역에서 청년들을 키워내는 것은 누군가의 신념과 꾸준함 없이는 불가능 할 것이다.
세대교체
봉사든 뭐든 이제 젊은 친구들로 세대교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가니 젊은 세대들이 지역에 나와주면 더없이 좋을 것 같다. 이 생각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해 오던 것이었다. 노동이 되는 봉사는 어쩌다 행사 하나가 되겠지만 나눔반찬같이 매일 해야 하는 봉사활동은 젊은 사람들이 이어주어야 지속할 수 있다. 젊은 봉사자 즉 3. 40대와 청년들, 청소년들등 세대간으로 나뉘어진 적절한 봉사현장은 앞으로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아질 것이다.
3부에서 계속
[이상기의 글로 보는 다큐]는 이 블로그에서 5부작으로 이어집니다. 최근 LG의인상과 방송에도 초대되어 시흥의 '인물'이 되었지요. 이상기대표의 삶 속으로 들어가봅니다. 이 원고는 2020년 시흥시자원봉사센터의 의뢰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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