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건 봉사가 아니라 관계형성
오랫동안 봉사를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의도치않게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관계가 흐트러질 때가 있다. 극단적인 경우도 있지만, 얼굴 생김새가 다르듯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이니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래도 어쩌다 봉사적 가치의 선을 넘어서는 사람을 보면 한마디 안할 수 가 없다. “바른소리를 해서 떠난 사람들도 있어요. 여러 말 신경썼으면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못했을거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뒷일을 봐주지도 못했을 거예요.”
봉사는 내세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는게 평소 지론이라는 이상기대표는 봉사하면서 불평불만이 많거나 신바람나게 할 요량이 아니면 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지않으면 일에 차질이 생기고 갈등이 생기기 때문이다. 비록 봉사지만 약속은 꼭 지켜달라고 한다. 또 음식이란 것은 먹을 사람을 생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조리를 해야 더욱 맛이 있게 되므로 머리를 쓰지말라고도 한다. “음식에 화가 들어가면 안되요. 먹는 사람도 좋은 마음으로 먹어야지.”
고마운 사람들
나눔자리와 함께 하는 봉사자들은 말로 다 못할만큼 고마운 사람들이다. 고마운 사람들이 정말 많다. 매일 나가는 반찬들이기에 매일 나와서 반찬을 만들어주는 봉사자들, 매일 나가는 반찬들이기에 필요한 식재료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주는 분들, 농사를 지어 농산물을 갖다 주는 분들, 양념을 몰래 식당 앞에 갖다 놓고 가는 분들, 반찬 용기 지원해주는 동주민센터, 무료칼갈이 해주시는 지역주민등등...
봉사릴레이
반찬나눔봉사를 하면서 매일 페이스북을 통해 진행 상황을 올리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혹자는 자랑하느라 올리느냐 하지만, 나눔이 필요한 곳, 나눔에 동참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다. 실제로 페이스북을 통해서 나눔이 필요한 곳의 정보는 물론, 십시일반 각종 양념 및 밭작물, 식자재들이 식당 앞에 턱 허니 놓여졌다. 아무 때나 “놓고가요~”하는 전화가 걸려오면 늘 대기중인 나눔자리 봉사팀들이 달려간다. 서넛이 빙 둘러앉아 재료를 손질하고 다음날 맛깔스런 반찬으로 완성되어 수혜자들에게 돌아간다. 봉사는 이렇게 여러사람에 의해 이어져간다.
기부천사
나눔자리문화공동체에서는 지난 6월 27일부터 29일까지 3일간, 열무김치 2.5㎏분량 250통을 만들어 ‘어려운 이웃과 계절 밑반찬 나눔’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열무김치에 사용된 열무와 양파는 홍두깨 칼국수(대표 조선옥)가 친환경 농법으로 직접 키운 농작물을 시흥시 1%복지재단을 통해 기부하면서 진행되었다.
홍두깨 칼국수는 매해 직접 재배한 식재료를 주변 이웃들과 함께 나눔을 실천하고 있었다. 이번에 전달된 열무와 양파는 소외계층 반찬배달사업을 하고 있는 나눔자리에서 열무김치를 만들어 사회 곳곳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뉘어졌다.
이상기 대표는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에도 이렇게 소외계층의 고난을 공감하고 행동하는 고마운 이들이 있어서 우리 공동체가 큰 문제없이 운영되고 있는 것 같아요.”라며 감사함을 전했다.
나누고자하는 기부자들의 고운마음. 정성으로 음식에 담아내지 않을 수 없다. 주변 이웃과 함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기회는 꾸준히 만들어져야한다. 지역의 건강을 위해서. 사람 사는 맛을 온전히 들이기위해서.
땀과 정성으로 직접 재배된 작물은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눠짐으로서 더욱 가치로워진다. 그 마음은 주변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해져 큰 힘이 된다.
가슴에 묻은 인연
청소년들과 김장을 담그기로 했다. 신부님이 백만원짜리 수표 한 장을 주었다. 안양에 있는 새벽시장에 가서 젓갈을 40만원어치를 샀는데, 젓갈파는 아주머니가 잔돈이 아닌 수표 백만원을 그대로 주었다. 받을 때는 몰랐는데 집에 와서 확인해보고는 깜짝 놀랐다. 몇날 며칠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순간 갈등을 했기 때문이다. "나도 사람인지라..." 백만원짜리 수표를 보며 돌려줄까 말까를 내내 고민했다. 백만원의 유혹은 매우 강했다. 그러나 도저히 마음이 불편해서 살 수가 없었다. 다시 안양으로 향했다.
새벽시장이라 오전 10시쯤 가면 한가하겠거니 하고 찾아갔다. 그런데 젓갈 파는 어르신이 그냥 갖다 쓰라고 했다. 당황할 정도로 너무나 쿨하게 말씀하셔서 오히려 당황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난 이런 사람 30년 동안 처음 봤어.” 도로 가지고 오는 사람이 처음이었다는 얘기였다. 아마도 여러번 잔돈을 잘못거슬러 주었는듯했다.
전세를 300만원이면 얻을 때였으니 40만원이면 제법 큰 돈에 속했다. 그런데 어르신은 도로 가져가라고 했다. 주고 싶다면서.. 손을 잡고 울었다. 마음이 편치않았다며 잘못했다고 했다. 진심을 다해서 빌었다. 그랬더니 그 어르신이 수양딸 삼자고 하셨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없지만, 세상에 그런 분도 존재하고 있었다. ‘잠깐 들러!’ 젓갈을 주고 싶을 때면 늘 그렇게 말하며 해마다 챙겨주었던 엄마, 젓갈파는 어르신. 가슴에 묻은 채 가끔 백만원짜리 수표의 기억을 꺼내보며 위로를 받곤 한다.
마음 아픈 사연
“이 동네에서 30년 넘게 봉사를 하면서 내가 돌보던 분이 사망자만 4분이나 돼요. 그럴 때마다 멘붕이 오지.” 그중에서도 얼마 전에 돌아가신 60대 어르신이 내내 마음에 박혀 슬프다. 죽는 순간까지도 자식 걱정만 하던 어르신은 그래도 마지막을 꼬까옷 입고 편하게 눈을 감았다.
“전에 말한 할머니 어제 돌아가셨어~” 안타까움이 묻어난 말끝이 떨린다. 떨린 말끝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자녀들에 대한 원망이 진하게 묻어난다. 자녀들은 할머니와 연을 끊은지 오래됐다며 장례식장에도 오지않았다.
할머니는 사람을 믿지못했다. 아파서 몸을 비비 꼬아도 애닳는건 복지사뿐이었다. 그나마 이상기대표에게만은 문을 열어주고 마음의 문도 열어주었다. 경찰을 대동하고 들어간 할머니의 모습은 경악 그 자체였다. 지병으로 아픈 고통은 온 방안을 똥칠로 얼룩지게 했고 얼굴과 머리에까지 엉겨붙어 말라비틀어진 채 할머니는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할머니와의 인연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장통에서 남이 먹다 버린 자장면을 주워먹는다는 제보를 받고 달려갔더랬다. 입성은 후줄근했으며 사람을 거부했고, 허리춤에 있는 전대에는 현금 수백만원이 있었다. 수급자로 들어온 돈을 10원 한 장 쓰지않고 모아놓은 것이다. 이유는 아들에게 주고싶어서란다. 찾아오지않는 아들, 인연을 끊은 아들을 기다리며..
10년간 돌보던 사람이 죽는다는건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10년 세월을 엄마라고 부르며 또 딸이라 부르며 돌봄을 하면서 반찬을 해다 주고 쓰레기더미인 집을 치워주었더랬다. 집수리도 세 번이나 해주었다. 점점 심해지는 할머니의 상태는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위태해보였다. 사람을 거부하니 복지사의 노고도 상당했다.
추가 인터뷰 하던 날, 이상기대표의 눈물 머금은 입 가장자리가 파리하게 떨렸다.
“어제 꿈을 꾸었어요. 새벽 2시 좀 넘었을거야. 의사 옷을 입은 사람 둘이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이 이렇게 내려다보는거야. 누가 죽으려나보다하고 잠에서 깼는데 4시 40분쯤인가 연락이 왔어요, 할머니 돌아가셨다고.” 바로 아들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딸에게 전화를 했다. 받지않았다. 사위도 받지 않았다. 돌봄을 통해 외로운 죽음은 면했지만 허무한 죽음이었다.
할머니는 생전 고통에 몸부림쳐도 병원은커녕 약도 먹지 않았다. 다 죽어가면서도 모두 가라고 손을 휘휘 저었다. 입원이 시급했다. 입원을 하려면 자식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다급한 이쪽 사정은 아랑곳않고 수화기너머 들려오는 말은 “그분과는 왕래가 없으니 전화하지마시오”였다. 딸에게 전화를 했다. 이핑계 저핑계대며 올 생각을 하지않았다.
할머니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죽어가는 엄마의 입원도 나몰라라 하는 자식들이 참 성숙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 때문이라면 신경 안써도 되고 멀다면 차로 데리러 가겠다고 해도 요지부동이니 아무리 원수 된 사이라고 해도 너무하다 싶었다. 어쨌든 입원이 시급하여 병원의 동의를 얻어 자식들의 입원 동의를 전화상으로 받아냈다. 아무리 활동가로서의 소임이라고는 하나 이런 경우 너무 화가 난다.
어찌어찌 입원을 하기위해 신천동 S병원 응급실로 갔다. 수액을 놓는데 병원에서 소견서를 써줄테니 큰병원으로 가라고했다. 간호사가 진득거리는 할머니의 몸을 같이 닦자고해서 닦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안갈아입고 안빨아입었으면 옷을 벗기는데 삭아서 찢어질 정도일까. 냄새 때문에 속이 뒤집어지는데 간호사의 쌀쌀맞음에 더욱 속이 상했다. 그리고 곧 세종병원으로 옮겼다.
세종병원에서는 병명이 나오지 않으면 3일 이상의 입원은 불가하다고 했다. 그런데 할머니는 진찰도 검사도 모두 거부했다. 그저 영양제와 수액만 맞을 뿐이었다. 따라서 어떤 치료도 하지 못했다. 코로나검사만 진행했다. 병원에서는 할머니의 살 날을 한달 정도로 보았다. 세종병원 의사와 간호사는 매우 친절했다. 그 더러운 옷과 똥으로 엉겨붙은 머리를 아무 소리도 않고 모두 벗겨내고 씻겼다. 보호자들은 대기실에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입원 얼마 후 치료가 되지않으니 퇴원을 권했다.
의사에게 명함을 주고 활동가라 소개하며 이대로 퇴원을 하면 케어할 사람이 없으니 죽고 말 것이라고 했다. 케어가 가능한 곳을 찾을 때까지 일주일간의 정리 기간을 달라고 했다. 의사는 좋은 일 한다며 의논 후 답을 주겠다고 했다. 신천동 주거복지팀에 연락하여 동직원들이 직접 쓰레기 천지인 집을 정리하고 한편으론 요양병원을 찾으러 다녔다.
한편으론 화가 났다. 한푼도 쓰지않아 모아져있는 돈으로 얼마든지 병원이나 약을 쓸 수 있었을텐데 왜 움켜쥐기만 했는지...
코로나 때문에 요양병원에 입원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코로나 검사도 했고 또 돈도 있었기에 병원 측에 하소연하여 겨우 입원을 허락받았다. 그리고 경찰 입회하에 전대에 있던 돈 중 일부를 꺼내 그동안의 병원비등등을 결제했다. 모든 영수는 사진으로 찍어 장부화했다. 다행히 수급자라 많은 돈이 나오지 않았다.
병원에 입원해있으면서 지금 생각해도 잘한 것은 할머니에게 새옷을 입히고 새신발을 신긴 것이다. 복지사에게 전대에서 20만원을 꺼내오라고 시켰다. 시장가서 장을 보기위해서다. 할머니가 죽기 전에 입을 몸빼바지, 속옷, 양말, 신발, 조끼등을 사자고 했다. 비록 만원짜리, 만오천원짜리에 불과했지만 새 옷이라서인지 할머니는 소녀처럼 활짝 웃어보였다. 할머니는 새신발을 내려다보고 꽃분홍 화사한 조끼를 연신 쓸어내리며 ‘이쁘다이쁘다’를 반복했다.
“회장님이 눈이 높아서 내 맘에 쏙 드는 옷을 샀다”며 좋아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퇴원하면 일도 해주고 파도 다듬어준다고 했다. 퇴원하고 나가면 영양제도 먹는다고 했다. 용돈도 준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곡기를 끊더니 겨우 달래가며 먹은 죽 한 모금도 모두 게워냈다. 호흡이 불안정하고 눈도 달라졌다. 그러나 정신은 말짱했다. 더듬거리면서도 “우리딸도 아닌데 복받을거유~”라고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장례가 진행됐지만 끝끝내 아들은 오지않았고 딸만 잠시 다녀갔다. 죽기 전 새옷을 입어 행복해하던 할머니와의 인연은 그렇게 10년만에 끝이 났다.
5부에서 계속
[이상기의 글로 보는 다큐]는 이 블로그에서 5부작으로 이어집니다. 최근 LG의인상과 방송에도 초대되어 시흥의 '인물'이 되었지요. 이상기대표의 삶 속으로 들어가봅니다. 이 원고는 2020년 시흥시자원봉사센터의 의뢰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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