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봄날...
코로나19가 주는 생활 속 음산함은 비의 습함과 같은 한숨을 준다. 우산이 거추장스럽다. 청바지 끝자락에 우산을 타고 떨어진 빗방울이 흡수된다. 인적 드문 골목 어느 오피스텔 지하. 칸칸이 나누어진 공간마다 각종 악기와 사무용품들로 가득하다. 김시영TV
시흥문화홍보대사로 더 익숙한 시흥의 가수 김시영. 홀로 시흥에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그를 「걸뚝」 에서 만났다.
2021년 5월 1일 토요일 오후 8시, 유튜브 방송 김시영TV를 개국한 그는 시흥의 공연 현장에서 심심찮게 보이던 행사기획자 겸 MC 겸 가수다. 그러나 코로나19는 모든 문화예술 활동을 강제로 멈추게 했고 그 또한 치열하게 직격탄을 맞았다. 현재 다이어트 중이라는 그는 다소 초췌(?)한 얼굴로 담담하면서도 때론 격앙된 감정으로 두서없는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만큼 쌓였던 것도 그래서 하고 싶은 말도 많았나보다.
최선과 열정으로 무장된 기획자 김시영은 노래 ‘먼지가되어’로 우리에게 7080 음악을 들고 다가왔다. 그야말로 기타 하나 동전 한 닢 들고 김시영만의 노래에 색을 입히며... 그는 시흥에서 어떤 문화인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그의 꿈은 무엇일까?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의 이야기가 지금 시작된다.
김시영의 과거
라이브통기타가 성행하던 시절, 가수 이상우씨와 한 회사 소속이었기에 같은 무대에 서서 활동도 하고 미사리도 다녔다. 메인이 아니어도 그저 기타 하나 둘러메고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자체만으로도 좋았던 그때, 벌써 20년 전 일이다. 2006년 솔로 음반으로 ‘먼지가되어’를 락버전으로 발표하고 나머지는 자신의 노래로 발표했다. 회사에 다니고 공연하러 다니고 방송도 나갔다.
어릴 때 꿈은 배우였다. 격투기 쪽으로 운동을 하고 사범 생활을 하기도 해서 액션배우가 되고 싶었다. 운동도 되고 노래도 되니 노래 잘하는 배우가 되고 싶었다. 잠시 있었던 극단활동은 ‘심부름’만 기억에 남겨두었다. 격투기 사범 생활은 군대에 있을 때 무릎을 다치면서 접어야 했다. 남은 건 기타치고 노래하는 것 뿐. 한 때 레크리에이션이 붐을 일으켜 대구에서 이벤트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찾아가는 프러포즈가 유행이어서 한창 바빴다. 대구MBC에서 리포터로도 잠깐 활동하고 음악으로 한창 활동할 때 결혼도 했다.
그러나 ‘내 꿈은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은 업소를 향해 달리던 자동차 안에서 핸들을 꺽게 했다. ‘서울 갈까?’ 그대로 펑크내고 홀로 서울에 정차해 버렸다. 아내에게 몇 개월만 참아달라고 전화로 말했다. ‘자리잡고 데리러 갈게.’ 앞, 뒤 없는 일방적 통보였다. 아내를 부모님 집으로 들여보내고 5개월 만에 불러올렸다. 논바닥 투성이었던 시흥을 보고 아내는 시골로 데리고 왔다며 볼멘소리를 해댔다. 하지만 논길을 걷더니 좋아한다. 그렇게 살기 시작했다.
시흥에서 첫걸음
김시영은 대구사람이다. 30대 중반에 올라와 자리 잡은 곳이 연성동이다. 살면서 한 번도 떠나본 적도 없고 떠나고 싶은 생각도 없는 곳이 된 연성동이다. 이제는 시흥이 고향 같다. 다른 곳에서 대구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시흥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반갑다. 시흥사람이 다 됐다. 아내를 불러올리기 전, 수개월 간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정착의 땅으로 시흥을 선택한 것은 잘한 일이었을까? 그런데 시흥도 김시영을 선택했다. 그 선택은 연성성당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신부님이 기타를 배워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신부님이 기왕 강의하는 거 신자들에게도 가르치자 제안해왔다. 물론 봉사였다. 어느 날 신자 수강생 중 한 사람이 ‘선생님! 이렇게 좋은 강의를 관공서(주민센터나 체육센터 등) 에서도 하면 어떻겠어요?’ 하는 제의를 해 왔다. 사실 그때만 해도 ‘나는 노래하는 가수다’ 라고만 생각해서 강의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리 빼고 저리 빼고 어찌어찌 버티다가 결국에는 하게 되었는데 그때 마침 TV에서 ‘쎄시봉’이라는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몰고 왔다. 전국적으로 기타교실이 성행했다. 그것과 맞물려 강의가 쏟아졌다. 기타교실은 활성화되었고, 급기야 일주일에 18개 타임을 소화해내야 했다. 다니던 밤 업소를 끝내고 행사와 강의 위주로 활동의 범위가 정리되었다. 우연을 가장한 기회는 그렇게 소소하게 찾아와 연결고리를 만들어냈다.
김시영씨는 과거 고향인 대구에서 했던 레크리에이션 이벤트사업을 시흥에 적용하고 싶었다. 시흥시에서는 당시 각 동마다 뜨락콘서트를 하고 있었다. 보조금을 지원받아 나름 돈을 들여서 콘서트를 진행하는데 행사치고 퀄리티는 떨어져 있었고 흡사 동네잔치같이 보였다. 아니 그런 평이 대부분이었다. 콘서트는 콘서트답게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각 동마다 기획안을 제출했다. 그중 몇 개가 채택되었다. 연성동, 목감동, 능곡동이다. 포크 음악과 대중음악을 접목하고 진행도 하면서 콘서트답게 보이려 심혈을 기울였다. 그렇게 시흥시와의 인연이 본격화될 무렵 시흥문화홍보대사를 뽑는다는 정보를 들었다. 40대 초반 나이라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뛰어들어보았다.
싸가지있는 김시영
일을 하다보면 의견이 엇갈릴 때가 있는데 과정에서 싸가지 없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적성에 맞지 않는 부분에서 주로 듣는 말이었는데 할 말은 하는 성격이라 그런 것 같았다. 10년 전과 다를 게 없는 현실... 실무자와 일을 하다보면 업무충돌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난 할 말을 하는 사람이지, 드센 사람이 아니거든요.” 사실 그렇다. 문화기획자들은 성공적인 행사를 위해 자존심을 건다. 그런데 어긋난 의견이 생기면 드세다, 독불장군이다, 같이 일할 사람이 못 된다 등등의 낙인을 찍어버린다. 파트너십이 발휘되어야 성공적인 행사를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시흥시문화홍보위원회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다. 시에서 지원금이 나오면 위원회에서 기획하고 공연하고 홍보를 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보겠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무산됐다. 어쨌든 시흥문화홍보대사들의 활약으로 시흥 시민의 공연문화 퀄리티가 올라간 건 사실이다. ‘시흥에서 이런 공연을 볼 수 있다니.. 시흥 문화 수준이 많이 올라갔네?’ 라는 평이 나올 정도로... 공부를 좀 더 하고 지원을 했더라면 아쉬움은 없었을까?
“지금은 아는 사람은 알아요. 제가 나쁜 사람은 아니다 라는 것을요. 좀 더 여유가 생겨서 합당하게 맞춰주는 정도가 되었지요.”
때론 누구와 친분이 있다고 오해를 하고 그로 인한 불이익을 받기도 했지만 아무리 아니라고 해봤자 한번 찍힌 낙인은 벗어날 수 있는게 아니었다. 그저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진정성을 보여주는 길밖에 없었다. 그 평가는 곧 이어졌다. ‘김시영, 열심히 하더라’라는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인정을 받아 바뀐 모습으로 왔다. 잘하지는 못해도 열심히 뭐든 적극적으로,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도 있는 탓이다.
“내가 여기 앞에 앉아있는 100명도 안 되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못 받는다면 대한민국에서 인정받을 수 있겠어요? 그리고 술을 마신 상태에서는 절대로 기타를 잡지 않아요. 노래할 때만큼은 최선을 다해서 하려는 게 나의 의지거든요. 나는 그걸로 먹고사는 사람이고 그걸로 사람의 마음을 뺏어야 하기 때문에 무대에 올라가서만큼은 에이, 관객이 별로 없네, 별로 재미없네 해도 허투루 안해요. 그게 제 신조예요.”
1인 법인, 소나기기획
홍보대사를 그만두고 잠시 호프 가게를 연 적이 있다. 그런데 술 마시고 주사 부리는 사람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 힘들었다. 미사리에서는 폼 잡고 다녔는데 ‘김사장 이리 와봐~’ 갑자기 반말에 하대하는 것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어찌어찌 2년은 버텼는데 결국 가게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사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소통·나눔·기쁨을 슬로건으로 둔 1인 법인 ‘소나기기획’이다. 문화예술법인단체다. 주로 하는 일은 공연기획, 악기연주, 교육, 악기 임대다. 설립 후 처음 1년간은 가수로, 음향 지원 나가는 음향기술자로, 임대자로 바쁘게 활동했다. 호프집 하면서 진 빚들을 갚을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에 행복했다. 그런데 코로나19가 터졌다. 그 와중에 사무실을 오픈했다. 법인은 2018년 7월에 설립했다. 하지만 1년 미만의 기획사 법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법인 설립 5년 이상이어야 1억 이상의 공연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법인 설립은 국가재난지원금 대상에도 제외시켜버렸다.
멈췄지만 멈출 수 없는
코로나가 생긴 후 1월 1일 시무식을 끝으로 모든 공연이 올스톱 되었다. 제출했던 기획안들도 서류철 사이에 끼워져 있을 것이다. 메르스나 사스 때는 장사를 못하면 공연이라도 하고 주민센터라도 갔는데 행사나 강의, 공연등이 모두 멈췄다. 사무실 월세도 대출로 겨우 해결하고 있다. 고정 수입원이 강의료였고 주 수입원이 행사 음향 임대였는데 막혀버리니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상황이 되어버렸다. 수업을 받는 수강생들조차도 답답하니 서, 너명이라도 구성해서 수업을 계속 하고 싶어했다. 현재 3명이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거의 개인 레슨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통기타교실을 추가로 운영하게 되면서 겨우 임대료를 해결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요즘 대세인 유튜브방송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김시영TV-첫방송
역사적인 첫 방송이지만 홍보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 다행히 성원에 힘입어 유튜브방송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조회(350회)수는 만족한 수치로 나와주었다.
김시영TV는 매주 토요일 오후 8시에 나간다. 김시영TV 방송은 7080 음악을 기초로 둔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7080과는 조금 다르다. 어디서 많이 들은 것 같은데 뭐더라? 처럼 잘 나오지 않는 노래이지만 주옥같은 노래들을 김시영버전으로 통기타로 들려주는 것이다.
첫 방송이 나간 후 댓글을 보았다. ‘처음 방송치고는 너무 잘 하세요’ 가 가장 눈에 먼저 들어왔다. 기분이 좋았다. 첫 방이라 흔쾌히 나와 준 게스트 두 분도 감사하다. 축하메시지를 보내 온 선, 후배 가수들도 감사하다. 방송 퀄리티를 올리고 컨셉을 정착시키고 구독자가 많아져 방송이 잘 되면 그때 출연 요청을 하려고 한다.
그는 어떤 길로 가게 될지 잘 모른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걸어가고 있는 중이고 열심히 오르고 있는 중임엔 틀림이 없어 보인다. 이제 시작이니 모든 것은 해나가면서 김시영만의 색을 입혀 진하게 드러낼 것이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김시영의 꿈
“방송 보시는 분들이 우리 고향에서도 이런 방송을 하는 사람이 있네? 라고 생각해주면 좋겠어요. 시흥의 대표적인 유튜버 가수로 생각해주면 더욱 좋겠습니다.”
최종목표는 미디어센터를 운영하는 것이다. 지역 안에서 소규모 방송들을 연계하여 ‘함께 하는 공동체 시흥’을 만들어 라디오방송을 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은 생각이 있다. 농사 짓는 사람들, 정보 공유 단절이 된 노인들 또 다수의 여러 사람들에게 공연 정보를 공유하는 방송이 있다면, 주파수 하나 받아서 지역 방송국을 운영하고 싶은 꿈. 어쩌면 유튜브 방송이 꿈을 향해 가는 길이지 않을까?
아내에게 한마디
“남들은 가수니까 노래도 듣고 얼마나 좋겠냐 그러는데 아내는 제 노래 좋아하지도 않고 제가 빌붙어 살고 있어요. 그래서 늘 고맙고 미안하죠. 고생한 보상을 주고 싶은데 마음뿐, 지금까지 잘 참아줘서 고마운데 조금만 더 참아달라고 합니다.” 사실 결혼 때부터 포기 반, 이해 반인 상태여서 포기가 이해로 돌아설 때도 있어 여러 가지로 매우 고마워하고 있다.
인터뷰 말미에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른다. 비 오는 날 김시영의 음색이 운치를 더해준다. ‘항상 여자친구가 기타 가방을 들고 다녔어요. 업소에서 차 한잔하고, 끝나고 술 한잔하고... 반강제적으로 따라다니게 했지요.’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영상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이 기록은 문화예술과 문화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으며 걸뚝 제4집에 담기게 됩니다
'시흥을 기록하다 > 걸뚝4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걸뚝4집] 달 아래 학전문학관, 우리가 읊는 시 (0) | 2021.09.10 |
---|---|
[걸뚝4집] 우리에게는 언제나 젊은오빠 (0) | 2021.09.10 |
[걸뚝4집] 실로암지역아동센터 김득수센터장 (0) | 2021.09.09 |
[걸뚝4집 인물편] 스스로 찾는 CEO, 삼호정밀 박주선대표 (0) | 2021.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