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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을 기록하다/마을을 기록하다

소래산아래 소산서원

              

겨울날씨의 찬기운은 여전하지만, 비교적 햇살이 따스한 어느 날 소산서원에 가기 위해 발걸음을 시도했다.


              

소산서원 들어가기 전 입구에 효자비각이 서 있다.

그 모습이 주위의 정리되지못한 여건으로 인해 

장엄함이, 중후함이, 귀함이 돋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계란마을과 소산서원 올가가는 갈림길에 서서 누구와 더불어 빛이 날 것인가...

 

               

마을의 안녕과 퐁농을 기원하기 위하여 세워지는 솟대가 한겨울 추위 속에 꿋꿋하게 서 있다.

솟대가 왜 있는건지 살짝 적어본다.


솟대는 개인의 가정에서 임시적으로 경축이나 기도할 때에 세우는 이름없는 신간이다.

둘째는 촌락의 입구나 경계 그리고 성역에 항시적(恒時的)을 세우는 속칭 솟대,거릿대,수살목이라는 신간이다.

셋째는 과거에 급제한 자가 자기 집앞이나 조상의 산소에 세우는 속칭 화주(華柱)라고 설명하고 있다.

 

소산서원은 소산재라는 재실을 지었으나, 1476년(세조12년)에 하연의 셋째아들 우명이 이곳에 영당을 세우고

소산재를 다시 지어 후손들이 쇄락한 소산재를 중건하였다. 후에 1995년 재중건하면서 소산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소산서원은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산12에 위치해있다.


소래산을 뒤로 하고 소산서원과 하우명정각, 하연선생묘를 관리하는 관리실이 우측에 보인다.

관리실 앞 마당에는 수형이 오래된 팽나무가 소산서원 들어가는 입구를 굳건히 지키고있다.

 

하제명(1407~1457년,예조화랑)선생과 하중호(1425~ ?)선생의  묘가 나란히 있다.



               


소산서원은 세종때의 명재상 문효공 경재 하연을 향사하는 곳이다.

하연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21살에 벼슬에 올라 이조판서, 대제학,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등의 벼슬을 두루 거쳤다.

올곧은 하연과 하우명선생의 선비정신과 효의 근원이 소산서원의 번듯한 기와와 소래산의 정기에 엄숙함마저 감돌게 한다. 


간간이 등산을 위해 지나가는 사람들만 눈에 띄었을 뿐, 한산한 소산서원은 무리지어 지저귀는 참새떼들의 소리만 울려퍼졌다.

그 소리가 참으로 청아하다.

 


소산서원은 1년에 두 번, 향사를 지내며 지역의 전통문화 보존과 주민들의 예절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날은 전국에 퍼져 있는 하씨 문중의 어른들이 대거 올라와 경건함 속에 행사를 치른다.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 된 하연선생 묘다.


문종의 스승이자 영의정을 지낸 삶이 기록된 신도비가 있는데 그리 화려하지 않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문인석 한 쌍과 석양 한 쌍 그리고 장명등과 만주석 한 쌍이 있다.


산길 외따로 들어가는 좁은 길, 나그네 잠시 쉬어가라고 친절하게 돌의자 하나가 놓여있나보다.

 

입정문을 지나 소산서원 앞이다.

세월 풍파 겪은 옛것의 투박함은 없으나 그래도 장엄하다.  

 

               

재실입구에 들어서니 그 안으로도 들어가보고 싶은 욕심이 생겨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하연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에서 경건한 맘으로 마주하며 잠시 서 있었다.


 하우명선생의 효자정각이 보인다. 그 뒤로 소래산이 품고 있다.


소래산은 299.4m이다. 정상은 인천주소이고 한자락 시흥에 연결되어있다.

 소래산의 유래를 살펴보면, 소정방이란 이름을 이야기한다.

나당연합국으로 백제를 공략하고자 중국 산음성의 래주에서 출발하여 덕적도을 거쳐 소래산에 머물렀던 뒤부터

소정방의 '소'와 소정방의 고향 래주의 '래'를 따서 '소래산'이라 불리웠다고 하는데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소정방과 13만 군사는 사비성(부여) 인근 남쪽 한참 떨어진 기별포,

즉 현재의 금강하류를 타고 수로를 따라 사비로 진격을 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위의 내용은 잘못 된 유래이다.

그렇다면, '소래산'이란 이름을 갖게 된 유래에 더 가까운 것은 무엇일까?

 

'냇가에 숲이 많다'는 '솔내'에서 유래 되었다는 설과 '지형이 좁다' 즉 '솔다'.'좁다'등에서 온 설이

더 신뢰성 있는 지명의 유래라고 기억 속에 담아내기를 바란다.

 

하연선생 묘 들목에는 삼남 하우명의 효자정각이 있는데

그 효가 옆에 있는 이들 모두에게 느낀바 가득하게 하여 나라에서 내린 정각이다.

 


하우명 효자정각은 맞배지붕에 한식기와를 얹은 목조 건물이다.

돌에 새겨진 한자가 보이지않아 읽기는 어려우나 그래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자라도 읽을수 있지않을까...


효자동지중추부사하우명

1988년 5월 31일 시흥시 향토유적 제11호로 지정되어있다.

안의 정려비는 높이 1.27m, 폭61cm, 두께 22cm의 규모이다.

이 비각은 1700년대에 처음 세워진 후 후대에 내려오면서 수차에 걸쳐 중수를 실시했다.

 

하연선생묘에서 내려다 본 아래는 명당자리란 과연 이런곳을 말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트이고 멋진 경관을 자랑했다.

풍수지리가 중요하던 때 얼마나 숙고하여 정했을까...


정갈하게 단장 된 하연선생묘부터 소산서원에 이르는 길 못지않게

계란마을 입구부터 하우명 효자정각에 이르기까지의 길도 정비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묘 앞에서 우연히 만난 하씨문중의 관리인은 관리를 시작한지 3개월여 되었다고 한다.

그의 도움으로 운 좋게도 소산서원과 안의 재실 그리고 효자정각 안의 비각을 볼 수 있었다.

 

숭덕재의 단아한 모습이다.

 

기와 사이로 보이는 소래산이 그저 등산하기 좋은 가벼운 산이라고만 느껴지지않는 것은 소산서원의 탓도 있으리라.


뒤켠에 앉아 누구라도 좋은 손길을 기다리는 화덕이 외로움 안은 채 웅크리고있다.

 

 
지켜야한다면 온 마음으로 지켜야한다. 이마음 저마음 다 버리고...

하나되는 마음이 어렵다면 하늘을 향해 있는 기와의 숭고함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