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왕본동행정복지센터(동장, 이석현)의 맞춤형복지팀(팀장, 김소연) 김선애주무관이 어둡고 차가운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초라한 행색보다 더 외로워 보이는 고령의 할아버지가 웅크리고 있었다.
어느 날, 지역주민이 제보를 해왔다. 한 어르신이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빈 가게에서 어렵게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폐지를 주우며 근근이 살아가는 할아버지에게 도움을 주고자 복지팀이 나섰다. 그러나 지원을 받을 수도 요청 할 수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존재하지않는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주민등록증 없이 산 85년! 1년여에 걸친 주민등록증 만들어주기 프로젝트는 정왕본동행정복지센터 복지팀의 사례관리로 전환되면서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성(姓)과 본(本) 창설 및 가족관계 등록의 재판 지원등 두 번의 재판과 신원보증을 통해 노력한 결과 85년 만에 처음으로 주민등록증을 부여받았다. 생일만 기억할 뿐 정확한 나이를 기억 해 내지 못한 할아버지의 구술인터뷰를 통해 전쟁당시를 가늠하여 85세라는 나이를 유추했다.
신준하(정왕본동, 85세)할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 옹진군. 전쟁당시 피난민이 되어 전라도 황등면의 피난민 수용소로 들어가면서 그 지역에서만 20년을 살았다. 부모와 함께 피난했던 당시 돌림병에 걸린 아버지가 주사를 맞다가 혈관을 잘못 건드려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도 바로 돌아가셨다. 외동이었던 당시 6학년 소년 신준하는 세상에 홀로 던져져 막막한 삶을 살게 되었다. 16,7살되던 무렵 수용소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이리시로 갔다.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 곳에서의 일은 몹시도 고되었다. 농촌에서의 농사일이었는데 타고난 체력 덕분에 견딜만했다. 2년여의 세월을 뒤로 하고 다음으로 들어간 곳이 정미소다.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기억이기도 하고 좋지 않은 기억이기도 한 정미소에서의 일은 가슴 한켠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정부의 정부미를 생산해냈던 정미소는 당시 예비역사령관의 안주인이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사령관이 있는 곳이니 누구하나 와서 신분에 대해 물어보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가능했던 정미소에서의 생활. 왜정 때부터 일을 배운 사람들이기에 기술을 가진 사람들보다 25명의 인부들이 일을 더 잘했다. 성실히 일한 댓가로 25명 인부의 반장역할도 했지만 안주인이 돌아가시고 나서 정미소는 문을 닫아버렸다. 당시 쌀과 쌀겨를 몰래 빼다 팔아먹는 친척도 있었지만, 정직하고 성실했던 할아버지는 주위의 신망을 받으며 사령관이 짓는 농사일도 봐주곤 했다. 열심히 일한 덕에 돈도 제법 모으고 집도 한 채 샀다. 그러나 당시 고속도로가 처음 국가사업으로 진행되면서 사령관의 권유로 투자하다 모든 것을 잃고 빚쟁이가 되었다. 갈 곳이 없어진 할아버지는 다시 황등면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피난민수용소에 기거할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해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사방군데 안다녀 본 곳이 없을 정도로 다니며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남대문 청과시장에서 사과궤짝을 지게에 져 나르는 일부터 부평에서의 집 짓는 곳 공사판까지 막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 20살 시절에 여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초등학교 6학년을 중퇴하고 피난행렬에 합류하면서 배움의 기회를 놓쳤지만, 아내는 중학교를 나온 4살 연상이었다. 함께 황등면으로 내려가 살았다.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날만 꿈꾸며 지냈다. 그러나 유전병으로 인해 아내는 5개월여의 병원 생활을 마지막으로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딸도 14살 되던 해, 엄마를 따라갔다. 아들은 학교를 다니지 않으며 방황하고 있었고 21살 되던 무렵, 중학교 선생을 만나 결혼하면서 이민을 갔다. 그때 이후로 연락이 끊겼다. 자식에게 아무것도 해줄 것 없는 못난 부모이기에 붙잡을 수도 없었고 찾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잃고 아들까지 떠나버린 그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할아버지는 좌절감에 빠졌다. 가끔 보고 싶을 때도 있다. 그렇다고 지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다.
“그저 저들끼리 잘 살고 있으면 그것으로 된거지”
가족을 모두 잃고 할아버지는 갈데가 없었다. 다시 부모처럼 대해주던 피난민수용소 원장님에게로 갔다. 군대자원입대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것도 녹록치 않았다. 서른 살이 넘은 연령으로는 입대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원장님의 도움으로 연령을 낮추어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원장님을 찾아가 호적관계나 신분증을 만들 방법을 찾고자 했으나 갔을 때는 이미 돌아가시고 없었다. 생활에 지친 할아버지는 인천, 부평, 부천등지로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젊었을 때야 가진게 몸뚱이뿐인지라 가리지 않고 일을 하고 또 써주기도 했지만, 나이를 먹으니 누구하나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끌게 된 리어카. 당시에는 폐지도 돈벌이가 되었다. 밥값이 2,3천원 하던 때에 하루 폐지 줍는 값이 3,4만원 정도였으니 먹고 살 정도는 되었다. 그때가 76세 정도였는데, 시흥에 온지는 20년 가까이가 되었다.
시흥에 들어와 살면서 신분증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안해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돈이 있어도 만들 수 없었다. 거주지가 있어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포기했다. 방을 얻어 들어가게 되도 나이를 먹으니 물어보는 이도 없었다. 아픈 데가 없으니 병원 갈 일도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면서 폐지를 줍고 공원에서 한뎃잠을 자니, 역전 뒤 어느 건물의 주인이 빈 가게를 내주었다. 추운데 가게 안에서 자라고 내준 그곳에서 10년을 살았다.
건물주의 사정도 딱한 상황에서 그래도 무료로 10여년을 잘 수 있게 해주니 세상 고마 울데가 없었다. 그러다 지금의 김선애주무관을 만나게 된 것이다. 맞춤형복지팀에서는 작지만 혼자 지내기에 충분한 따뜻한 집을 지원해주었고, 현재는 임시신분증이지만 3주후면 정식으로 주민등록증이 발급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할아버지의 생활에 변화가 시작됐다. 월셋방이라도 있으니 잠자리가 편해진 것이다. 아직도 꿈만 같은 주택생활은 4개월째 적응중이다. 집이 생겼다고 해서 게을러지지는 않는다. 변함없이 할아버지는 새벽 3시면 일어나 노래방에서 나오는 깡통을 주우러 나간다. 하루에도 서,너번 씩 다니고 기초수급의 혜택과 매일 줍는 폐지로 조금 더 나은 생활을 하고 있을 뿐이다.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여전히 할아버지는 외롭다. 조용하고 말 수 없고 낯가리는 성격 탓이다. 그것은 혼자 있는 것의 익숙함을 만들어버렸다. 아는 사람도 없고 어디 갈 데도 없다. 밥도 혼자 먹는다. 집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한 번도 밥을 밖에서 사먹어 본 적이 없다. 복지관에서 가지고 오는 반찬으로 일주일을 산다. 인터뷰 하던 날 아침에도 갈비탕을 데워서 멸치조림과 함께 먹었다. 겨울이 되면 어떻게 살아야하나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보일러를 작동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한겨울, 공원 한뎃잠을 잔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에 비하면 춥지 않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건강이 밑천이라 병원신세를 진적은 없다. 최근 4,5년 전부터 시작 된 불편한 다리 외에는 견딜만하다. 나이를 먹어 다리가 무거워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건물이 있다고 사람을 너무 무시할 때는 서럽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정미소에서의 생활을 떠올리곤 한다. 사모님이 계셨으면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좋았던 기억이든 좋지 않은 기억이든 세월이 그만큼 흘렀기에 다 잊어버리고 사는거지 아무 생각이 없다. 그저 먹고 사는 것 뿐이지...”
신준하할아버지는 이제 투표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병원도 갈 수 있게 되었으며, 전입신고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당연한 것들이 할아버지에게는 80년 넘는 세월동안 한 번도 할 수 없었던 것들이어서 기쁘다. 그 기쁜 마음을 말로 표현 못하고 마음으로만 간직했는데, 이번 인터뷰를 통해 속내를 내어주었다. “보답을 해야하는데....” 뭐라 말을 못하고 목울대만 꿀럭거릴 뿐이다. 그 표정에서 할아버지의 진심이 느껴졌다. 문득문득 입을 꾹 다문 채 쓸쓸한 표정 짓는 얼굴 속에서 먼저 간 아내와 딸, 그리고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드러나 보였다.
연락처가 없기에 폐지를 줍고 잠 잘 시간 무렵인 오전 11시만 되면 매일 한차례씩 들른다는 김선애복지사는 할아버지를 살뜰하게 살피고 있었다.
웃음조차도 낯선 할아버지의 웃음은 수줍은 소년의 미소처럼 너무나 해맑았다. 깊게 패인 주름만큼이나 굴곡진 삶. 시흥시민으로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주민등록증이 손에 쥐어지는 순간, 할아버지가 지어보인 함박웃음은 어쩌면 소외당했던 세상에 대한 미움보다는 고마운 마음을 더 크게 안게 해준 세상을 향한 미소가 아니었을까!
할아버지를 보듬어 안은 세상, 시흥시가, 정왕본동행정복지센터가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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