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염전 4km정도 구간, 소금을 실어나르던 가시롱차라고 있었다. 뒤뚱거리며 광활한 염전 레일 위를 달리던 최명순(죽율동, 66세)씨는 가시롱차 운전기사였다.
충청도에서 태어난 최명순씨는 1975년, 어쩌다보니 정왕동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20대 초반 군대에 다녀오면서 시작한 군자염전 가시롱차 운전일은 지금 생각해보면 다시 돌아가고픈 추억의 시간이다.
주안염전, 군자염전, 소래염전이 차례로 없어지면서 회사가 문 닫을 때까지 해왔던 가시롱차 운전과 기계 고치는 일은 19년을 보내고 또 그만큼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염전 현장의 소금창고에서 포장한 마대 소금을 카(그는 가시롱차를 이렇게 불렀다)에 실어 군자역전에 내리는 일은 염부들보다 수입도 괜찮았고 나름 재미도 있었다.
소래염전에서는 기계고치는 일을 했다. 가시롱차, 경운기, 오토바이등 당시 1000개 정도 되는 온갖 기계들은 모두 그의 차지였다.
[엄마없는 하늘아래 영화의 한장면 발췌]
가시롱차는 화물용으로, 기차로 보면 앞부분은 기관차처럼 생겼고, 뒤로는 수레같이 길게 연결되어 있다. 당시 군자염전에서 소금을 실어 나르던 가시롱차는 4대였다. 소래염전에도 4대가 있었다. 남동염전에는 한 대가 있었다. 남동염전 3개구에서 2개구는 소가 끌었다.
군자염전이 공단을 개발이 되면서 소래염전으로 넘어가 그곳에서 10년을 더 일하고 회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그만두게 되었다.
600호 정도 되는 군자염전의 소금은 시간이 조금 지나 포장을 한다. 그러면 사무실에서 연락이 온다. 지시를 받으면 포장된 소금을 싣고 군자역으로 향한다. 군자역 옆에는 소금을 쌓아놓는 창고가 있었다. 군자역은 지금의 정왕역이다.
당시 군자염전에 놀러 온 사람들은 염전 땅이 워낙 넓으니 가시롱차를 타고 싶어 했다. 실어 놓은 소금 위로 사람을 앉히면 100여명은 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을 태울 수는 없었다. 레일로만 다니기에 탈선의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사고가 나면 책임을 져야 한다. 당시 운전하는 이가 술을 마시는 바람에 탈선한 적이 있었다. “살살 달려서 다친 사람은 없었어. 그런데 바다에 빠져버렸지.” 운전수가 높은 사람의 동생이기에 아무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염부반장과 가시롱차 운전수는 발령직이다. 염부들은 임시직이다. 3월에 채용했다가 10월에 퇴사하는 형태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다시 취직을 한다. 사람들은 염부 일만 해서는 먹고살기 힘들어 동시에 농사를 지었다. 염부 일을 하루종일 하는 것이 아니기에 주어진 서,너시간 동안의 점심시간을 이용해 서로 도우며 품앗이로 농사일을 거들었다.
평소에는 서늘할 때 준비를 해놓고 해가 지면 소금을 모아 들였는데 비가 오는 날이면 일을 못하니 각 구의 휴게실에 모여 뻥(화투)을 쳤다.
1등은 공으로 놓고, 2등은 천원, 3등은 3천원, 4등은 4천원해서 4명이 쳤다. “그때만 해도 4천원이면 컸어” 도일시장의 술집에 다니다 인근 안산에 좋은 술집이 생겨 장소를 바꾸었다. 뻥을 여러 번 쳐서 판돈의 프로테이지를 따져 1등은 10%, 2등은 20%, 3등은 30%, 4등은 40%를 냈는데 나오는 술값만큼 퍼센트로 계산하는 방식이다. 그때는 술 밖에 먹을 것이 없었다. “저녁이 되면 힘드니까 코밑이 촉촉할거 아냐. 술 먹기 전에 현장에서 밥을 줘. 그럼 속이 든든하잖아. 일을 빨리 끝내고 마음이 통하면 나가서 또 먹어.” 그런 재미라도 있으니 힘든 염부 일을 버틸 수 있었다.
한달이 30일이면 일은 보름정도만 했다. 천명이 넘는 염부들이 있어도 늘 일손이 부족하기에 늦게 출근해도, 설렁설렁 일하는 사람이 80%가 되어도 눈감아줬다. 소금을 재는 자가 있어 그것만 잘 재면 내버려두었다. 생산량은 책임자가 있으니 맞춘다. 염부반장은 열심히 한다.
그렇다고 마냥 노는 건 아니다. 오전에 안 나오면 오후에 나오고 나올 때는 먹을 것을 싸가지고 온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다. “월급을 받으려면 받는 만큼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
월급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다. 월급날이 되면 인천 상업은행에서 관리자가 경리와 함께 간다. 요즘은 인터넷뱅킹으로 송금처리 하지만 당시만 해도 차가 없으니 먼 길 돌아 다녀온다. 사무실에 오면 각 구 감독이 월급을 수령한다. 감독은 각 호 반장에게 나누어준다. 반장들은 6,7명 되는 염부들에게 나누어준다. 그런데 사고가 났다. 감독 집에서 반장이 월급봉투를 수령하여 현장으로 가는데 도둑에게 몽둥이로 맞은 것이다. 도망을 갔지만 바로 잡았다. 붙들고 보니 아는 사람이었다. 염전 다니다 도둑질을 하기 위해 일을 그만둔거였다.
한달 힘들게 일한 월급을 도둑맞았으니 염부들이 무척 속상해했다. 그러나 없어진 돈 만큼 회사에서 채워주었다. “염부일이 힘든데 월급이 안 나오면 맥이 없잖아” 회사에서는 염부일이 힘드니 살살 달래가면서 일을 시키는 편이었다.
염전에서의 일과는 소금을 내다가 낮에 농사일을 도와주고, 볼일을 보고, 밥을 먹고, 그런 일상의 반복이었지만 그래도 막 벌어먹기는 좋았다. “앞으로의 희망이 없지, 괜찮았어”
이웃집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더 친해지면 족보까지도 알게 되는 이웃들은 개발과 함께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당시 염전에서 함께 일했던 이들은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났다. 그때의 추억을 나눌 사람들이 없으니 외롭다. 어쩌다 한사람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희망이 없는 직업이었지만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 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레일 위로 털털거리며 소금을 실어나르던 가시롱차는 최명순씨의 세월도 함께 실어날랐다. 그리고 가시롱차의 추억은 갯골생태공원 소금창고 너머에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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