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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왕마을이야기/정왕본동-YOU

선장 박영흥. 평생 지켜온 바다에서 떠올린 그리움


태풍 콩레이의 영향으로 오이도바다는 몹시 출렁였다. 비도 세차지는 않았지만 모든 것을 적시기에는 충분했다. 그래도 어선은 띄어졌고 바다로 나가기 위해 사람들은 승선에 주저함을 보이지않았다. ()더불어함께가 주관하고 시흥시가 주최한 2018시흥정왕권 평생학습네트워크 소권역 사업으로 진행된 네모기행 가을스케치에서 오이도문화체험-어부의 삶을 엿보다의 주제로 바다 위에서 박영흥선장을 만났다. 오이도 바다에서 평생을 살아온 어부, 박영흥선장의 배를 타고 오이도 선착장에서 출발하여 송도, 팔미도 앞을 경유하며 제철을 맞이한 쭈꾸미 낚시와 더불어 오이도 바다를 스케치하였다그런데 태풍이 불었다. 배를 띄울 정도의 바람이긴 했지만 세찬 출렁거림은 멀미를 주었다. 늠름하게 파도를 가르며 나아가는 설봉호’. 박영흥선장의 노련한 조타 솜씨는 막힘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바다와 함께 한 세월만큼 덥수룩한 수염 너머 보이는 수줍은 듯 한 미소와 순진무구한 눈빛은 바다를 대할 때면 냉정한 눈빛으로 돌변한다. 평생 물길을 갈라도 함부로 대하지않는 바다에 대한 자세이려니. 찌에 물려 올라오는 쭈꾸미 하나에 소주 한 잔의 낭만은 배 위에서가 아니면 만끽할 수 없을텐데 안전상의 이유이긴 하겠으나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설봉호는 거침없이 파도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오이도에서 나고 자란 그는 이미 촌로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배 위에서만큼은 청춘의 힘이 남아있다. 마을에서는 마을을 지키는 마을지킴이로 바다에서는 바다와 평생을 친구로 삼는 어부로 그의 삶은 오이도에서 선 굵은 역동이었다.

    


오이도는 예부터 모시조개, , 동죽으로 유명했다 한다. 동죽회는 아직도 토박이들 사이에서는 특별히 주문하여 먹을 정도로 향수를 일으키고 있고, 동죽칼국수는 큰 인기를 끌었으며 짬뽕 재료로도 쓰였다고 한다. 다시 동죽칼국수를 메뉴화하기에는 가격이 비싸 엄두를 내지못하고 있지만 그 옛날 동죽은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이었다. 반월공단 경계와 소래포구까지 퍼져 풍부했던 동죽은 10, 20년을 잡아도 다 잡지 못할 정도로 많았고 매일 1인당 50kg씩 채취가 가능했다. 우스갯소리로 장마철에 다 떠내려갔으면 좋겠다 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런데 사라졌다. 개발로 인해... 수십년이 지나 오이도 어촌계에서 동죽 종패를 뿌리고 키워 내 2년에 한번씩 동죽캐기작업을 한다. 100여명의 어촌사람들이 바다가 갈리는 시간대, 갯벌 5km를 걸어들어가 1인당 20kg씩 캐는 모습은 장관을 이룬다.

 

시화호와 반월공단이 들어서기 시작했던 1970년대 부터 오이도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갯벌은 서서히 좁아지고 조개 수도 사라졌다. 마을 사람들은 이주단지로 몰려갔고, 덕분에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남아있는 자들은 고향이 있으나 고향을 잃어버리는 참담함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떠밀려 나갔다.

 

현재 오이도는 시흥시의 대표 해양관광단지로서 이름이 나고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지만, 옛것과 지금의 것을 지키고 보존하며 발전을 모색해야하는 동시과제는 오이도마을에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안겨있다. 오이도바다를 바라보며 회환에 젖은 박영흥선장의 눈빛 속 아련함은 오이도마을의 과거에 머물러있다.


60, 70년대 초에는 어디나 그렇듯 먹고 사는 문제로 어려운 시기였다. 구호물품을 받아 먹기도 했으니 치열한 삶은 하루하루가 버겁기만 했다. 잠시나마 반월공단이 들어섰을 때는 경제활동에 녹색불이 켜지기도 했다. 그러나 시화호의 등장은 그 많던 조개의 수를 급격히 줄어들게 만들었고, 수자원공사의 처음 계획이었던 시화호 담수화는 취소되었다. 바다의 오염이 문제로 제기되었던 것이다.


주 소득원이었던 동죽 수확도 무너지면서 농사에 기대했던 부지는 용도변경으로 아파트와 공단이 들어섰다. 주민들은 분노했고 그 분노의 표출로 데모를 하여 이주로 몰리는게 된 것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심한 박탈감을 느껴야했다. 마을 사람들이 원치 않는 개발, 이주, 새로 유입해 들어오는 상권, 모든 것은 강제성이었고 상처만 남겼다.


그러나 수자원공사측과 일부 협의도 있었는데 그것은 지금 완성된 오이도선사유적공원 조성이다. 철강단지나 버스 차고지가 들어설 예정이었다고 하는데 그 곳에 살던 주민들이 유적지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반신반의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주에 대한 심난함은 잠시 접어두고 공부를 해나갔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서 신기하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직접 명확하게 확인을 하고 싶어 책을 보았지요.” 그래서 관련 서적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완전하게 오이도 선사유적지라는 믿음을 안겨준 것은 탄소 동위원소 연대측정의 결과에서 근사치로 나오면서부터다. 5,000년의 역사가 묻혔있던 선사유적지. 오이도의 자랑이 될 만하겠다 싶었다. 그리고 보존할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더 유심히 들여다보며 관심을 갖고 선사유적공원으로 조성되어 가는 과정들을 지켜보았다. 보존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 시민단체들과 연대해나갔다. 문화제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시에 의뢰를 하고, 개발 보고서를 제출해가며 서해안의 패총 지키기에 돌입했다. 그러나 발굴조사가 끝났다는 이유로 보고서는 받아들여지지않았고, 주민들과 시민단체들은 행동으로 나섰다. “문화재 발굴은 끝이구나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도 뱃사람들의 오기가 있지. 생계에 지장을 받으면서도 무지막지한 개발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정말 다들 고생 많이 했어요. 조상 무덤으로 고발도 했으니 우리가 할건 다 한거야.”


결국 여러 사람들의 의지와 도움으로 문화재로 지정이 되고 참여했던 주민들과 시민단체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선사유적지는 완성되었다. 그러나 생각과 다르게 개발되어 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안타까움도 있었다. 되도록 옛것을 보존하는 차원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원했으나 그렇지 않게 된 것이 아쉬운 것이다. 다만 바람이 있다면 완공이 되었을 때 시설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닌 수익창출과 일자리창출 그리고 마을과의 연계를 통한 활동이었다.

 

이후 관리 직원이 들어오고 해설사가 들어오고 학생들과 주민들이 수업을 통해 들락거리는 것을 보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오이도선사유적공원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그들이 오이도의 역사와 더불어 오이도포구에서 추억과 낭만을 즐기길 바라고 있다.


낙후된 도시나 마을은 발전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마을은 사람이 살기에 좋고 주민이 원하는 마을이어야 한다. 무분별한 개발은 상처만 준다. 길이 막히고 바다가 막히면 사람은 살기에 퍽퍽해진다. 적어도 마을을 위한다면 마을에 남아있을 명분을 주어야하지않을까...?


박영흥선장의 먹먹한 눈빛은 출렁이는 바다에 고정되며, 지나온 오이도마을의 변화를 투시하듯 깊은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 이 사업은 시흥아동·청소년지원네트워크 주관·주최, ()더불어 함께가 기획하고 삼성꿈장학재단에서 후원합니다. '당신을 만나고싶습니다 YOU' 사람을 지역의 자원으로 발굴, 연계하여 지역력을 높이는 일을 목적으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