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시의 도시브랜드인 '바라지와 산업단지의 도시, 시흥'의 모태가 된 ‘바라지’ 이야기를 하려한다. 바라지라는 말은 순 우리말이나 어려워한다. 도시브랜드화 하려 했지만 시정부가 바뀌면서 브랜드화 하기 위한 모든 노력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브랜드명으로 사용하기에는 다소 억지스런 면이 있다고들 하지만 바라지라는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을 위해 설명을 하려한다.
갯벌을 막은 것을 방죽이라 칭한다. 엇방죽, 뒷방죽, 앞방죽, 새방죽, 가물치방죽등... 시흥에는 방죽의 이름이 많았다. 방죽은 바다를 막은 것이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다. 바다를 막으면 처음에는 땅을 사용할 수 없다. 짠물이기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 년간 농사를 짓지 못한다. 이 상태를 ‘바라지’라고 한다.
‘못쓰는 땅을 바라지’라고 하는 것이다. 쓰는 땅은 바라지라고 하지않는다. 못 쓰는 땅에 4,5년간 빗물을 받아서 버리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갈대를 심는다. 갈대를 뽑고 나면 피를 심는다. 2,3년 심고 뽑기를 반복한 후에 벼를 심는다. 벼를 심기 전까지는 못 쓰는 땅이다. 그런 과정을 겪고 나면 벼를 심고 생산을 한다. 벼생산을 위해 거치는 10년의 과정, ‘못 쓰는 땅이지만 언젠가는 이롭게 이바지할 땅, 그것이 바라지’다.
언젠가는 이바지를 할 땅=‘바라지’라는 것이다. 이것이 정확한 바라지의 뜻이다. 예부터 내려오는 이름으로 전국적으로 바라지라고 불리우는 땅이 많았다.
언젠가는 이로움을 줄 땅이지만 이름이 없으니 ‘바라지’라고 불리운거다. 어린 시절, 둑방을 막으면 생기는 웅덩이에서 게도 잡고, 헤엄도 치며 놀았다고 한다. 그 바라지땅에서...
바라지에서 10년을 인내하며 견뎌 낸 세월, 지금은 이로운 땅이 되었다. 대표적인 그 땅이 ‘호조벌’이다.
장경창선생은 시흥 장곡리에서 대대손손 살아오고 있는 교장 출신 민간향토사학자이다. 시흥의 역사와 마을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모든 것을 기록하고, 또 시흥의 역사를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아낌없이 모든 지식과 자료를 나누어준다.
애매하거나 사실이 아니거나 왜곡된 역사는 과감히 버리고 사료나 족보나 역사집에서 증거하는 것들을 내세우며 신뢰를 준다. 그리고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의 후손으로서 인선역사공원을 만드는데 앞장서고 인선왕후 축제위원장을 맡으며 지역의 특화된 문화행사를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또 시흥의 뿌리를 안고 사는 장경창선생은 진정 역사와 기록의 중요성을 알고 올바른 역사문화를 시흥에 정착시킬 인물로 손색이 없다.
시흥의 마을기록가로서 장경창 선생은 더없이 귀한 시흥의 살아있는 역사박물관이라고 인정하며 또 존경한다. 그의 인품은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을정도의 훌륭함이 있다. 그에게 듣는 시흥의 역사. 그 수많은 역사기록을 누가 할 것인가! 역사를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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