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 들어와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주민자치라는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활동 범위 안에 들어왔다. 마을에 관심을 두니 마을만 눈에 들어왔다. 마을을 애정하는 마음이 깊어질수록 애증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발전이 더딘 매화동’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또 정착시키기까지 들였던 수많은 시간, 어쩌면 고립된 상태에서의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매화동을 제외한 주변 지역, 장현지구나 은계지구, 목감지구 등이 변화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매화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발전을 원하는 한편 느껴지는 상대적 박탈감을 지울 수 없다. 매화동에 얽혀있는 어떤 요인에 제약이 있기 때문일까? 주거단지가 들어오는 다른 지역과 달리 산업단지가 들어온 순간부터 바라는 마을의 모습은 회색빛으로 점점 짙어져 간다.
매화동은 오래된 마을이다. 노인인구가 전체의 약 40%에 달한다. 섬같이 고립된 마을의 재개발, 재건축에 대한 수요와 욕구는 있지만, 현실성은 떨어진다. 촌로들은 더욱 나이가 들 것이고 후대로 넘어간다 해도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
매화역을 중심으로 매화신도시(자칭)가 들어설 계획이 거론되면서 매화동의 정체성에 빨간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위 ‘늙은집’이 많은 매화마을은 신도시와 구도심 사이의 괴리감을 예고하고 있다. 눈을 들면 저기는 최첨단도시고, 여기는 낡은 집이고, 저기는 산업단지며 앞에는 논이 있는 이런 아이러니한 조합의 마을이 없다. 매화산업단지, 매화지구, 매화본동(그는 매화마을을 이렇게 불렀다), 호조벌.. 이런 형태가 된다는 것인데, 오래된 도시, 마을일수록 난개발이 많은 시흥시이고 보면 매화동 구도심도 비껴갈 수 없어서 더욱 효율적이고 살기 좋은 거주 환경의 조성이 요구되고 있다.
“호조벌을 중심으로 ‘매화본동’을 ‘자연건강지구’로 ‘지정’한다면 지나친 바람일까요?”
매화동 하면 호조벌이 먼저 떠오른다. 호조벌은 1970년대에 농지 정리를 해놓은 곳이다. 155만 평의 호조벌. 엄청난 곡창지역의 자원은 호조의 농민들에게는 수익을 내는 생계가 되고 일반 주민들에게는 경관이 된다. 그리고 매화동에는 ‘호조벌축제’가 있다.
호조벌축제를 만든 김면수씨를 빼놓는 것도 서운할 일이다. 시작은 마을에서 일 좀 한다는 사람들이 ‘우리끼리 모여서 그냥 하루 놀자’였다. 소위 마을 잔치의 성격이었다. 시작 지점은 25년 전부터이지만 중간중간 빠지는 해를 제외하면 올해로 19회차를 맞이한다. ‘그냥 하루 놀던’ 다음 해에는 매화교회를 중심으로, 그다음 해는 호조벌 걷기대회를 했다. 일반 주민 몇 명이 모여 시작한 놀이가 축제위원회, 주민자치위원회 등의 유관단체가 개입되면서 본격적인 마을 축제로 자리를 잡으며 호조벌축제의 역사를 만들어간 것이다. 호조벌축제이니 당연히 호조벌에 맞는 컨셉으로 접근했다. 매화초, 도창초 아이들이 호조방죽을 따라 걷기대회에 참가하는데 길게 늘어서 걷는 모양이 장관을 이루었다.
축제를 진행하는 입장에서 보면 벼가 익어가거나 추수를 할 무렵이 그림이 잘 나오고 풍성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데 당시에는 농민들의 이해가 지금 같지 않았다. 이해의 폭을 좁히기 위해 접근을 달리했다. 모내기 철에 모를 심고, 벼가 자라는 동안 도울 수 있는 것들은 단체에서 힘을 보탰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니 농민들이 한창 바쁠 때 뚱땅거리고 놀고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맞는 말이었다. 한 개의 단지를 빌려 가운데만 벼를 베고 가장자리의 벼는 체험용으로 제공하는 것을 축제의 한 꼭지로 만들어내고, 일체의 비용은 지불하는 것으로 협의했다.
“논으로 들어가자고 주장한 죄로 책임감이 어깨를 짓눌렀지요.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무슨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이걸 하고 있나.. 하며 몇 날 며칠을 바가지로 물을 퍼낸 적도 있지요.”
호조벌축제는 학교 운동장에서 체험 부스나 공연 위주로 진행되다 논으로 들어가는 컨셉이 적용되면서 농경놀이 문화 축제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우리끼리 노는 것이니 시행착오조차 즐거웠다. 농경놀이를 문화화시키는 작업은 적중했다. 농민들은 농민들대로, 주민들은 주민들대로, 서로를 이해하며 농경문화와 축제문화를 바꾸어나갔다.
시흥시 곤충산업연구회, 벅스월드에서 아이들과의 놀이가 더 좋은 지금을 살고 있다는 김면수대표. “매화동은 애증인 것 같아요.” 사람들은 흔히 제2의 고향이니 마음의 고향이니 이런 말들을 하지만 ‘내 마음속’의 매화동은 ‘애증’이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생각을 마음에 품고 있지만 품고 있다고 해서 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매화동을 떠나고 싶지도 않다. 좋은 자연환경과 좋은 마을 사람들이 있어서다.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는 일이 내겐 최고의 행복이에요.”
*이 인터뷰는 경기에코뮤지엄 지원사업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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