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모동의 전씨 집성촌에서 나와 터를 잡았던 할아버지는 5대를 잇는 자손을 시흥의 땅, 호조벌에 정착시켰다. 당시 주소는 부천군 소래면 미산리. 아버지에게, 아들에게, 딸에게, 손주에게, 호조벌은 삶의 터전이자 놀이터가 되었다.
전영준 대표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매우 빠른 속도로 사진이 전송되어왔다. 패다.

「경기도 부천군 전숙도
귀하는 모범 독농가로서 영농 개선과 농가 소득증대에 이바지한 공로가 현저하므로 이에 감사드리고 계속 농촌 근대화에 기여하여 주시기를 바라면서 이 패를 드립니다.
1971. 5. 15. 농림부장관 김보현」

호조벌의 기상이 찬란한 아침 햇살을 몰고 와 무던히도 울어 젖히던 아기 영준, 그래서 목청이 그리도 큰 것인가!
어린 영준은 호조벌을 바라보면서 여름에는 헤엄치고 물고기를 잡으며 식물과 곤충채집을 했다. 겨울에는 스케이트나 썰매를 탔다. 호조벌에 있던 마을의 공동 우물에 빠져 혼비백산하던 놀라움보다 아버지에게 혼나는 게 더 두려웠던 꼬맹이 시절, 반면 감기에 걸려 엄마의 등에 업혀 걷던 기억은 따스함으로 남아있다. 배추와 무를 심어야 한다며 밭으로 오라는 아버지의 득달같은 전화에 소달구지 덜컹거리던 꼬부랑길을 소나타로 달릴 때는 느티나무가 길옆으로 늘어서 있는 시골길의 향수를 아련한 추억으로 소환했다.
비교적 빠른 24살의 나이에 결혼하고, 대야동으로 이사를 가 지금의 ‘시보당’ 건물에서만 50여 년 가까이 살고 있다. 갓 결혼하여 낳은 첫째 딸 보미는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이 사시는 미산리에 맡겨져 3년을 살았다. 보미는 호조벌 끝자락 통배미우물 옆에 있던 미산 유아원에 다녔다. 당시 유아원 원장님이 시흥문화관광해설사로 활약하던 김문자 선생님이다. 한번은 가방을 개구멍에 집어넣고 친구들과 놀러 나가 돌아오지 않는 손주 딸을 찾느라 동네방네 찾아다니던 일화도 있었다. 지금과는 다른 이웃의 정이 그때는 있었기에 친구 집에서 놀고 있던 어린 보미는 너무도 해맑은 표정으로 걱정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표정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5대를 이어 직선의 길보다 곡선의 길에서 볼거리를 찾는 전씨 일가는 광활한 호조벌에서 중요한 삶의 가치를 찾으며 아버지로부터 받은 호조의 들녘을 걷는다.
그리고 이 삶이 다하는 날, 후회 없이 이곳에서 잘 놀았노라 하며 60대 중반의 전영준 대표는 초록의 일렁이는 벼를 바라보며 호조의 시를 읊조린다.

육십 먹은 아들이 구십 되신 아버지께 드리는 글
다랭이 논두렁 길을 걷노라면
등짝에 나의 작은 가슴을 안고
당신의 손으로 만들어 주신 지게를 지고
혼자 걷다 보면 미끄러져 논으로 빠진 날
차가운 논으로 자상한 눈빛 건네주고
돌아보면 이만큼 살아온 날들이
지게만큼 당신은 가벼워지고
받치는 작대기는 하염없이 흔들립니다.
*이 인터뷰는 경기에코뮤지엄 지원사업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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