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토박이, 미산동에 뿌리를 잇다.
아련한 인생이 녹아있는 나의 고향, 나의 동네
어린 만종과 동생은 깊이 판 도랑 안에서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머리 위로 흙이 떨어지고 포탄이 터졌다. 땅 위는 온통 불바다였다. 집들이 불에 타고 호조벌도 피해를 입었다. 다행히 미산 마을에는 포탄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자비한 전쟁
국민학교 2학년에 해방을 맞은 어린 만종은 9남매 중 다섯째다. 누구랄 것도 없이 먹고 살기 어려웠던 때 설상가상 전쟁까지 치러야 했다. 평택으로 피난을 갔을 때는 많은 식구가 어느 집 외양간에서 신세를 져야 했다. 전쟁상황은 예측할 수 없었고 아군의 활약으로 수복이 된다 해도 당장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폭격기에 안전을 보장할 수도 없었다. 다행히 주인집 할머니가 인심이 좋았다. 알고 보니 같은 집안사람이었다. 할머니는 아들 하나를 양자로 삼고 싶어 했다. 아무리 입에 풀칠하기 버겁고 또 자식이 많아도 선뜻 자식을 내어 줄 부모가 어딨겠는가! 다음날 가족은 밤을 방패 삼아 길고 긴 걸음을 걸어 안산 야목까지 갔다. 협궤열차 선로를 타고 올라가는데 바로 전날 폭격이 심했었다고 한다.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죽어 널브러져 있고 정적 가득한 세상에 시계 소리만 째깍째깍 울렸다. 마을이 바로 코앞에 있지만,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끝나도 끝난게 아닌 전쟁의 후유증은 땅속에 있던 화약이 햇빛을 보면서 불이 일어 다시 폭발하고 미산교회에서는 교인 중 하나가 불발된 수류탄을 주워 두드리자 터져 버린 일도 있었다. 전쟁 후유증은 그렇게 몇 사람을 더 죽음으로 데려갔다.
개구쟁이 만종이는...
포동에서 생산된 소금이 협궤열차에 실어지면 어린 만종은 호기심에 열차에 올라타 들키면 도망가기 일쑤였다. 가출도 빈번하게 했다. 어머니의 눈에 눈물을 많이 흘리게 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았다. 서른셋에 결혼하여 직장을 다니면서도 농사일은 빠질 수 없었다. 바쁜 농사철에는 한 사람의 손이 매우 절실하기 때문이다. 고된 삶이지만 시대가 그랬다. 비록 부모에게 받은 유산은 많지 않았으나 열심히 산 덕에 약 2천 평 정도의 땅을 소유하게 됐다. 알뜰살뜰 성실히 살아 마을을 지켰다. ‘아니, 마을이 나를 지켰다.’
미산동 마을회관 앞마당에는 커다란 연자매가 있다. 정만종씨가 기증한 것이다. 집안사람이 해방 후 무역하면서 마을에서 손꼽는 갑부가 되었는데 그 댁에 있던 거다. 재산을 정리하고 부평으로 이사를 한 후 인수한 사람이 연자매를 하천에 방치했다. 농로 어딘가에 묻혀있어 반쪽만 보존이 됐다. 누군가에게는 골칫거리지만 누군가에게는 유물인 그것은 경산아파트 앞으로 옮겨졌다가 대보름 행사가 열리는 농경지에 옮겨졌다. 연자매는 어려서부터 보고 많은 것을 느꼈기 때문에 늘 관심이 있었다. 네 번의 이사 끝에 정착하게 된 연자매의 가치는 미산회관 앞마당에 전시됨으로서 빛이 났다.
정만종씨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도 아침이 밝았습니다.오늘도 평온한 가운데 하루 하락해 주시고 남은 여생 하루하루 건강하게 살아가게 해주세요."
그러면서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 사람이나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다 빈손으로 가잖아요. 그냥 이렇게 살고 끝날 걸 욕심을 부리면 뭐하나~ 물에 밥 말아 한 끼 때워도 마음이 편하고 몸이 건강하면 그것으로 됐지.”
라며 바쁜 와중의 인터뷰를 마쳤다.
※ 돌로 만든 방아의 하나. 둥근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은 것으로, 이것을 소나 말이 끌어 돌려서 곡식을 찧고 빻는다.
-이 인터뷰는 경기에코뮤지엄 지원사업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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