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같이 까만 새벽, 끼이익 노 젓는 소리가 까만 새벽을 가른다. 일정하지 않은 물 소리가 끼이익 거리는 소리에 묻힌다. 잠깐의 적막이 흐르고 둔탁한 물소리가 풍덩하고 까만 새벽을 깨운다.
"영임아~ 영임아!"
열려있는 나무 대문을 지나 버선발로 달려 온 경자가 마당 한가운데에 철푸덕하고 넘어진다. 마당에 들러붙어있던 흙들이 흩어지며 뿌옇게 날아오른다.
"조심해라~"
영임이 마루로 나서며 퍼뜩 일어나 다시 달려오는 경자를 안쓰럽게 쳐다본다.
"야야~ 호근오빠야가~ 호근오빠야가~"
"왜? 뭔데?"
"호근오빠야가 새벽에 죽었다안하냐~ 한강에 나룻배 끌고 가가~"
순간 머리가 띵해져왔다. 왜? 라는 의문도 생기지 않았다. 호근오빠가 죽었...다?
영임이는 유난히 날씬해보이는 전신거울 앞에 서서 이리저리 맵시를 보았다. 새로 맞춘 고동색 양장이 맘에 들었다. 164cm의 큰 키에 통통한 몸매를 가지고 있는 영임은 새로 맞춘 고동색 양장에 높이 3cm의 검정 구두 뒤축을 살짝 들어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8남매 중 맏딸인 영임은 부유한 부모 밑에서 세상 부족함없이 살고 있는 아가씨다.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전형적인 동양미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유난히 맏딸을 예뻐하는 아버지 덕분에 기성품은 사본적도 없다. 모든 계절 옷은 맞춤으로 하고 구두마저 수제로만 신었다.영임의 엄마는 돈을 방석아래 넣고 꺼내쓰는 말그대로 돈방석을 깔고 앉은 안방마님이다. 영임의 엄마는 방석아래 깔아놓은 현금들을 이웃을 위해 썼다. 쌀이 없다고하면 쌀을 팔아주고 약값이 없다고하면 약을 사다줬다. 돈이 없다고하면 돌려받지못할 돈을 빌려주었다. 펑펑 쓰고 싶은대로 쓰는 돈은 써도써도 줄지않았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말을 키우고 있는 말집의 재산은 영임의 친할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고 그 재산을 영임의 아버지가 잘 관리하여 더 많은 재산을 불렸다. 집을 짓고 집을 허무는 일을 하는 집안이었다. 그 동네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부잣집이니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키워내는 맏딸에게 혼담은 일찍부터 있었다. 마포구 효창동 말집이라고 하면 이웃 동네까지 다 알정도로 소문난 집의 장녀였으니.
"영임아~ 나한테 시집와라"
"시집? 싫어"
"평생 손에 물 안묻히고 살게 해줄게! 고생 안시킬게"
"그래서? 그래서?"
경자의 호들갑이 호기심 서린 눈으로 변하며 앞가슴마저 영임의 코 앞으로 들이밀어졌다.
"뭐가 그래서야. 싫다고했지"
"아, 왜! 왜 싫은데? 너 아니면 장가안간다고 아저씨 아줌마한테 있는 땡깡 없는 땡깡 다 부렸다는데~"
"마음이 안 가"
"지랄한다, 복에 겨워서~ 인물은 좀 딸려도 엉? 재산 많겠다, 결혼하면 그 대궐같은 집에서 살게 되겠다 엉? 너라면 꿈뻑하지, 호근오빠 부모님이야 말해 뭐해? 세상 자상한 양반들이지! 대체 뭐가 마음에 안들어?"
"일단 못생겼어"
앉은뱅이 탁자에 턱을 괴고 영혼없는 눈빛으로 나직하게 읊조리니 경자가 배를 잡고 까르르 웃으며 몸을 뒤로 젖힌 끝에 자빠진다.
"사실...."
사실 인물은 좀 딸려도 사람은 괜찮았다. 좋은 사람이었다. 세상 순둥하고 세상 자상한 사람이었다. 부모님의 자상한 품성르 그대로 물려받은듯했다. 재산도 상당했다. 그런 사람과 결혼을 하면 평생 호의호식, 사랑받으며 살 것은 자명하다. 그런데, 동생들이 너무 많았다. 영임도 줄줄이 동생이 일곱이 있다. 호근오빠도 줄줄이 동생이 일곱이다. 동생을 돌봐야하는 맏딸로 힘들었던 영임은 호근오빠의 동생들까지 감당해야하는 장남의 맏며느리 노릇이 죽기보다 싫었다. 단지 그 이유였다.
"그래서 내가 벌 받은건가봐."
영임은 딸 정희에게 가슴에 묻어두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푸념하듯 내뱉었다. 남편이 죽은지 1년이 지나서야 고백한 과거의 아픈 기억. 혼자가 되니 오만가지 생각이 회한으로 남은 탓인가.
"진짜? 그런 일이 있었어? 그래서? 그 집에서 가만 있었어? 엄마 찾아와서 우리 아들 살려내라 안그랬어?" 영임과 똑 닮은 얼굴을 한 딸 정희가 장난끼 가득한 눈빛을 반짝이며 다음 말을 채근한다.
"좀 떨어진 아랫동네 살아서 오진 않았지. 그 사람 청혼을 받지않아서 죽게 만들고 그 벌을 내가 평생 받게 된 거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해."
"그냥 그 사람한테 시집가지 그랬어. 그랬으면 평생 고생은 안했을거 아냐"
"그럼 니네는 없었겠지. 너나 정헌이나"
"없으면 어때? 엄마만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빈 말이 아니었다. 정희도 그렇게 편한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었기에 뱉어낼 수 있는 말이었다.
나이 칠순 중반이 되어도 영임의 얼굴에는 주름살 하나 없다. 고생한 것에 비하면 여전히 부잣집 마나님처럼 고운 얼굴이다. 타고난 피부임에 틀림없다. 정희도 그렇다. 정희의 오빠 정헌도 그렇다. 나이에 비해 모두가 동안이다. 영임의 여동생, 남동생들 모두 동안을 자랑한다. 정희도 외탁을 했다. 정희는 친정엄마인 영임의 탄식섞인 표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틀니 뺀 얼굴이 비틀어져 보인다.
'여인의 삶으로는 기구한 인생'
정희는 친정엄마를 볼때마다 자신을 투영하기도 한다. 그때 내가 엄마였다면...
칠흑같이 어두운 밤, 세찬 빗줄기가 세상을 삼켜버린 어두운 골목, 입술을 꼭 문 사이에 신음소리가 나고 퍽퍽하는 둔탁한 소리가 빗소리 사이에서 간헐적으로 울린다. 어둠 속에 두 사람이 엉켜있는데 한 사람은 바닥에 엎드려있고 한 사람은 몹시도 분주한 팔과 발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 년아! 이 쌍년아! 니가 나를 우습게 봐? 내가 그렇게 우스워? 왜 날 무시해!"
얼핏 봐도 바닥에 쓰러져있는 사람은 만삭의 임산부였다. 만삭의 배를 부여잡고 어떻게든 사내의 발길질이 배에 닿지않게 하기 위해 웅크리고 있다. 흥건하게 고여있는 땅 위의 빗물에 핏물이 섞인다. 에잇! 하고 돌아서가는 사내와 웅크려 그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꼼짝도 않고 있는 임산부. 겨울비는 웅크린 만삭의 임산부를 집어삼켰다.
'이제 나는 죽는구나'
비와 어둠이 집어삼킨 몸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체온의 열기가 떨리는 손끝에서 가까스로 살아나고 있다. 만삭의 임산부가 뱃속의 아이를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한다. 일어난 바닥에는 빗물과 피와 눈물과 양수가 뒤섞였다. 엉금엉금 기어 집까지 가는데 그 길이 멀고도 멀게 느껴졌다. 그 새벽, 임산부는 뱃 속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사람 하나 겨우 서 있을 정도의 공간인 부엌하나, 2평 남짓의 작은 단칸방이 전부인 하꼬방 집은 연탄마저 꺼져 냉골이었다. 젖은 몸을 닦을 여유도 없이 이불을 있는대로 깔고 곤로에 성냥을 당겨 스텐 대야에 물을 받았다. 가위를 꺼내 열탕소독을 하고 명주실을 꺼냈다. 아아악~~ 단발마의 비명이 튀어나오고 곧 아기가 나왔다. 아기가 울지않았다. 등을 토닥였다. 여전히 울지않았다. 아가야, 제발, 제발... 눈물마저 흘릴 기운도 없는데 손은 계속해서 아기의 등을 쓸어내렸다. 힘찬 아기의 울음이 터졌다. 찢어질듯 아픈 몸을 뒤척여 가위로 탯줄을 자르고 태반을 꺼냈다. 죽기를 각오하고 낳은 아기였다. 지칠대로 지친 몸은 냉골의 방에서 포대기에 싼 아기를 품에 안은채 널부러졌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아까 그 사내였다. 방문이 젖혀지고 어둠속 광기에 서린 표정의 얼굴이 훅 하고 들어왔다. 순간 몸이 웅크려지고 아기를 꼭 안았다.
"이거 이거 왜 드럽게 인상쓰고 있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사내는 그녀의 남편이었다. 영임은 눈물을 입에 물은채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영임의 남편 동만은 포대기에 싸여진 아기를 흘깃 보더니 바로 나가버렸다. 지칠대로 지친 영임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태지에 덮힌 갓난아기를 죽을 힘을 다해 닦은 후 기진맥진하여 다시 쓰러져버렸다.
'이대로 죽어도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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