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아학교로 사용되고 있는 이 곳은 옛 궁터로 궁의 건축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서촌마을 탐방이 시작되었다. 빛이 참 좋다.
이런 날은 자연조명으로 사진 찍는 것이 재미있어진다.
서촌쪽은 평야였다. 서촌지역은 왕의 사냥터로 넓고 동물들이 많았다.
이성계의 아들들이 서촌 쪽에 궁을 짓고 살 때 궁궐의 고관대작들은 북촌에 기와집을 짓고 살고
궁의 허드렛일을 하는 이들은 서촌에 다닥다닥 집을 짓고 살았다.
북촌의 한옥은 기역자, 니은자, 사랑채로 따로 설계되어 전통적인 한옥구조로 보존가치가 있다.
그러나 평민들이 살았던 서촌은 작은 기역자 구조에 모서리부분에 작은 마당이 있으며
방문을 열면 골목이 보이고 창문을 열면 옆집이 보이는 구조를 보이고 있다.
북촌의 마을이름은 삼청동, 계동등 이름이 별로 없으나 서촌은 한 불록이 문중인만큼
목인동, 효자동, 내수동등 13개의 동네이름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전통가옥은 기와에서 떨어지는 빗물마저도 고풍스런 멋을 자아내는데 일본인들 건축의 관여에서는 물받이를 강제했다]
세종이후 후궁이 되었던 왕족의 가솔들은 궁을 벗어나 기거할 거처의 곤란으로 200명은 스님이 되어
절로 들어가고 300명이 이곳에 남아 나라에서 관리를 했다고 전해진다.
[땅의 허가면적에 돌출되는 기와의 측량으로 고민하던 집주인은 기와를 평평하게 재단하여 얹는 우스꽝스런 설계를 보였다.]
또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는 인왕산 아래 왕이 태어날 운이 있다 전해들은 광해는
본인을 그 주인으로 만들어 경희궁을 경복궁역 근처에 지어 왕권의 소용돌이 속에 살았다.
그러나 광해가 죽은 후 서촌은 텅 비게 되었다.
서촌의 건축물은 수없이 만들어지고 없어지고를 반복했다.
서울의 중심이라고는 하나 세월의 오랜 시간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마을의 집은
그대로 보존이 되고 있었다.
유명한 웹툰화가가 샤프로 그렸다는 전봇대 벽화는 마을의 역사인물들을 보여주었다.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과 쌍벽을 이룬 이가 있었으니 이름이 윤덕영이다.
이완용의 집은 4천평이나 윤덕영의 집은 1만2천평에 달했다.
윤덕영은 서촌 일대를 싹 갈아엎고 궁을 지었다. 남아있는 사진을 보니 유럽풍의 대저택이다.
대저택이었던 자리에 대문이라고 추정되는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집이 너무 커 대문에서 현관문까지 우마차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윤덕영에게는 끔찍하게 아끼는 딸이 한 명 있었는데, 윤덕영이 지은 중세유럽풍의 대저택에 비하면
소박하지만 이 집에도 숨은 재력이 힘이 작용되었다.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건축가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어 지은 집으로 세계의 모든 건축양식이
다 들어간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고 한다.
창문 하나도 같은 것이 없이 모든 건축기법이 들어가 있다는 호화저택.
지금은 박노수 종로구립미술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위쪽의 건물이 윤덕영의 아방궁 벽수산장이며 아래 보이는 서양식 건물이
딸의 집인 박노수 미술관이다.
예전에는 두 건물 사이에 구름다리를 놓았었다고 한다.
완전 헐~ 이다.
서촌마을에도 관광객들이 들기 시작하면서 많은 변화를 보였는데 단순한듯 고급진듯
독특한 이름의 가게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이 집은 주인아저씨 혼자서 가꾼 집으로 1층 카페는 딸이 운영하고
2층은 관광객들에게 개방하는데 인테리어가 매우 특이하다.
멕시코풍의 발코니는 이국적인 풍경을 보이고 있고,
'서울 꽃으로 피다'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꽃, 나무등 녹화재료지원금 300원 상당을 받았다.
[윤동주시인 하숙집 터인데... 3개월 정도 살았다고 전해지며 이 또한 정확하지 않다고 한다.]
[푸른양귀비카페. 인테리어가 추리소설에나 나옴직한^^ 최지우주연의 드라마 촬영 준비중에...]
[벽을 뚫고 들어가 있는 와인]
[공원조성의 계획은 있으나 진행이 여의치않은 탓에 멈춰버린 개발. 고작 한 작업이라고는 가로질러 있는
돌다리를 다시 주워 걸쳐놓은 것이다.]
수성동계곡이다.
이 곳에는 시내와 암석의 경치가 빼어났던 인왕산 기슭 수성동 계곡 골짜기를 그린 그림이 있다.
수성동계곡에는 안평대군(1418~1453)이 살던 비해당터와 기린교로 추정되는 다리가 있다.
[무인 꽃가게]
[딱 이 정도만큼의 테이크아웃점]
[보존가치가 있을 법한 이발관]
색다른 역사적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우리가 흔히 알고 말하는 것 중에 '남아선호사상'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조선의 송사기록을 보면 딸이, 오빠나 남동생이 부모를 모시기기로 약정하여
재산을 포기했는데 부모를 제대로 모시지 않으니 재산을 달라, 내가 모시겠다 하는 기록이
상당 부분 발견되었다고 한다.
미국이나 일본은 여자가 결혼을 하면 남편의 성을 따라가지만 한국은 본인의 성을 그대로 가지고 간다.
이는 자기 성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자격권리가 있음을 뜻한다.
조선이란 나라에서는 여자가 결혼을 하면 재산권이이나 가족의 구성원으로서의 의사결정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니 새로운 사실에 귀가 솔깃해진다.
공자의 가르침에서 여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공자는 남자, 아버지에 대한 관심이 많기 때문에 일제가 만들어 놓은 남아선호사상, 출가외인등의
뒷받침 논리의 이용에 불과할 뿐인 해석을 내놓는다. 물론 일제가 만들어놓은 것이다.
일제는 여자와 어린이와 노인이 필요없었다. 전쟁에 쓸모없었으니까.
우리의 한옥을 보자.
우리의 한옥을 보면 제일 가운데자리가 안방이다. 안방의 주인은 여자다.
남자는 사랑방을 지키며 책을 보고 사람을 맞이하여 나라와 집을 걱정하는 역할이다.
여자란 존재는 그러했다.
일본이 만들어놓은 남아선호사상, 출가외인에 묶여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조선중기문화에서 중인들에 의해 형성되었던 예술문학은 '위향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기록되어졌다.
양반문학과 서민문학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중인문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문지식인과 기술직의 중인이 주도한 것이지만 조선중기부터 시작된 위향문학은 중인들의 예술혼이 깃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중인계층에 의해 창작된 모든 문학작품 정신이 이곳에 담겨져있다.
이곳은 문화와 예술의 발신지로 서울 사대문 안에서 가장 아늑한 주거지인 동시에
가장 개방적인 문화의 발신지로 꼽히고 있다. 인왕산은 왕이 인정한 서울 최대의 명승지다.
또한 이 곳은 숙종, 영조, 정조 대의 조선 르네상스가 배태되고 성장한 공간들 가운데 하나였다.
사대부의 충절과 의리의 정신이 옥류동 계곡에서 후손들의 개방적인 학문과 예술로 꽃을 피운것이다.
1817년 추사 김정희(17986~1856)가 이들 중인들의 활동에 대한 존중의 표시로 옥인동의 한 바위에
'송석원'이라고 큰 휘호를 남긴 흔적이 있다.
바람이 시원한 서울을 가로질러 다시 맑은 생명도시 경기도 시흥시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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