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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소설

제9화 여자라서(가칭)

얼굴로 살얼음이 날아와 박히는 듯 아려왔다. 미끄러운 발끝은 시리도록 시려웠다. 아직 동이 트지않은 짙은 어둠의 새벽은 인적하나 없었다. 간간이 살얼음 낀 도로 위를 슬슬 기어가는 차들만 움직이는 존재를 밝힐 뿐이다. 이른 새벽, 눈뜨면 고봉으로 된 밥을 찾는 남편의 아침상을 차려놓고 일을 하러 나선 영임의 고된 생활은 벌써 1년이 지나고 있었다. 남에게는 그저 좋은 한량으로, 가족에게는 한없이 가혹한 괴롭힘을 일삼아 온 동만은 급격히 나빠진 건강상태가 되어 갓 육십 넘은 나이임에도 일을 하러 나서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월세라도, 공과금이라도 내려면 영임이 일을 하러 나서야했다. 얼마되지않는 7평 월셋방마저도 쫒겨날까봐 밀린 월세를 마련하러 나서야했다. 다 늙어서 일을 하러 나서는 것을 말리지않는 남편 동만이 원망스러웠다. 젊었을적 돈 벌게 좀 놔두지, 다 늙어서 돈 벌러 나가게 하다니. 돈 좀 버는 것 같은 딸과 사위가 보태주면 좋으련만. 아들이야 기 센 아내 얻어서 기도 못 펴고 용돈마저 쪼들리게 받고 있으니 애시당초 기대도 않는다. 시린 발 끝에, 시리도록 아린 얼굴에 사무치는 서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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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의 기억에 제대로 된 집에 산 것은 효창동 2층 단독주택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월세이기는 하나 그저 아빠에게 당한 성적학대에 대한 무리수로 엄마 영임은 다락방이라도 딸 정희를 위한 공간을 내주고 싶어했다. 아는지 모르는지, 입밖으로 전혀 내놓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모질게 말하기도 했다. 방 하나 주지않으면 집 나갈거라고. 오십이 넘어서야 엄마 영임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정희는 어쩌면 엄마는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면서 입밖으로 내지않고, 그저 내색하지않고, 행동으로 옮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형편에 맞지 않는 방 3칸짜리가 그랬다. 다락방조차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는지 이후 마당 딸린 허름한 단독 기와집을 얻게 된 것도 온전한 방 한칸을 딸 정희에게 주려는 노력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정희는 모질게 뱉어내는 말들로 엄마 영임의 가슴에 큰 대못을 수도없이 박아냈다.

 

다락방 문에 걸쳐놓은 문고리를 젓가락으로 들어 열고 추행하는 일이 다반사였던 단독주택. 훗날 영임은 그 집이 가장 좋았다고 자주 되뇌이곤 했다. 그런데 왜 이사했어? 라고 물으면 그냥 월세를 못내서 쫓겨났다고만 했다. 하지만 젓가락으로 다락방 문고리를 연 것을 본 영임은 방 한 칸 마련해주기 위해 이사를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월세를 밀려 쫒겨날 판이었다는 것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단독주택의 월세보다 더 비싼 마당딸린 허름한 기와집 월세가 한달에 40만원이나 되었다. 비쌌지만 감행한 것은 순전히 딸 정희를 아빠로부터 지키기위한 영임의 궁여지책이었다.

 

정희가 물었다. 엄마는 왜 우리 두고 도망안갔어? 씁쓸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영임이 말한다. 애비 없는 자식 소리 듣지않게 하려고. 나 하나 참으면 되지. 니네들 결혼할 때 옆에 아빠 자리 비면 무시당할거아냐. 그리고 엄마는 경제적 능력이 없어. 몸이 망신창이가 돼서. 아빠 동만이 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엄마 영임에게 가해지는 구타는 쉬지않고 있었고 구타가 없을때는 모질게도 거친 말을 내뱉었다.

 

영임의 무리한 이사가 효과가 있었던거지 허름한 기와집 방 3칸짜리로 가서야 아빠 동만의 끔찍한 손길은 멈췄다. 사회생활을 할 무렵이어서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가며 주말에는 성당에서 봉사하는 일을 하느라 집에 있는 날을 두지 않은 탓도 있었다. 물론 늦은 귀가 뒤에는 항상 따르는 것이 딸자식 그따위로 키울래? 라며 엄마 영임에게 향한 손찌검이었다. 아들이나 딸이나 성인이 된 이십대 초반이 된데다 경제적인 자립도 할 수 있는 상황이어서 폭력을 행사하는 아빠라는 사람을 두고 볼 나이는 지나있었다. 늘 소극적이고 우유부단한 정헌이 술에 취해 옹골진 주먹으로 엄마 영임을 치려는 동만을 개새끼야! 죽어!”라며 밀어 뒤로 자빠지게 했다. 순간 아빠 동만의 표정을 보고 정희는 ! 이제 우릴 무서워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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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듯한 효창동 전세방에서 도화동 달동네 위로, 위로, 또 위로 올라가다 거기에서 내려올때는 기찻길 옆 단칸방이 되어 있었다. 좁고 허름한 골목가에 있는 단칸방은 가벽 하나 사이로 옆방에 다른 이가 살았다. 동네 아이들이 노는 골목길에 있는 화장실에서는 볼일을 보면 똥물이 튀어올라와 엉덩이에 닿기 일쑤였다. 화장실을 다녀오면 항상 뒷물을 했다. 기차가 지나갈때면 책상 위 컵에 든 물이 출렁거렸다. 하지만 좋은 것도 있었다. 신선한 새벽공기 마시며 기찻길을 걷고 또 걸으면 사색에 잠기게 되고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왜 자꾸 고만고만한 집으로 이사를 자주 해야했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월세 보증금이 거덜나서 쫓겨나는게 대부분이었다는 것은 나중에서야 알았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한다지만 마지막으로 몰린 곳이 지하 단칸방이었다. 그때 정희와 정헌은 출가를 했고 동만과 영임 둘만 살게 될 때였다.

 

깔끔하게 해 놓은 도배 덕에 두 내외가 살기에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사한지 열흘도 안돼 새로 한 도배는 곰팡이가 슬고 갓난아기를 데리고 다닐 수 없어 정희는 이사를 종용했다. 결국 그 해 장마로 침수가 되면서 가구들이 모두 물에 잠기고 말았다. 긴급구호품을 받았다. 외며느리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는지 반응이 없다. 보다못한 정희는 남편에게 어렵사리 말을 꺼내 보증금 삼백만원에 월 삼십만원의 작은 방 한 딸린 방 두 개짜리 2층 단독주택을 얻어주었다. 방에 딸린 부엌은 부엌이라고 하니까 부엌인가보다 할 정도로 좁아터졌다. 계단 몇 개를 내려가면 계단 아래 한 사람 들어가면 꽉 차는 화장실이 있었다. 그나마 수세식 변기였다. 앉아서 볼일을 보는 변기이기는 하나 그곳에서 샤워는 할 수 있었다. 주인집 아저씨의 변덕으로 양변기를 놓기전까지는 그래도 샤워 정도는 할 공간은 있었다. 하지만 양변기를 놓은 이후로는 샤워는커녕 빨래조차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햇빛 잘 들어오는 안방에서 머리 대고 누울 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영임이다. 사위 볼 면목은 없지만 그래서 늘 미안하고 얼굴을 바로 볼 수 없지만 처지가 그러하니 미안하고 면구한 마음은 꾹꾹 숨길 수 밖에 없었다.

 

2층에 사는 주인집 할머니는 영임을 몹시도 좋아했다. 하루도 거르지않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며 안부를 묻고 음식을 나누기도 했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그 좁아터진 곳에서마저도 동만의 폭력은 여전했고 사정을 알게 된 주인집과 옆 방에 사는 세입자들도, 동네 사람들도 처지를 알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말 수 없고 점잖은 영임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이들이 많아졌다. 심한 당뇨를 앓고 있던 남편이 길가에 쓰러져 신고를 받고 출동하는 경찰과 119 구조대의 도움도 유명해졌고, 또 유전인 탓에 소아당뇨를 앓던 아들마저 아빠 동만의 나쁜 술버릇을 그대로 물려받아 정신을 잃고 길거리에 쓰러져 영임은 남편은 물론 아들마저 찾으러 다니는 기구한 삶을 살아야했다.

 

사위가 마련해준 월세보증금마저 까먹게 될 즈음 밀린 월세를 해결하고자 주인집 할머니의 소개로 인근 대학병원에서 청소부일을 하게 된 이후, 통장을 빼앗겨 주인집 할머니에게로 가 월세와 각종 공과금을 뺀 나머지 몇 만원, 혹은 십만원대의 돈을 받고 나면 그렇게 눈물이 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술 취한 남편과 아들을 찾으러 여기저기 헤메고 다니다 발견하여 무거운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올때면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열두번씩 들었다. 정희는 그런 엄마 영임의 고된 삶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희는 정희대로 친정 때문에 진 빚을 갚다갚다 눈덩이처럼 불어나 감당하지못해 남편 태윤이 해결해주어 알고도 모른 척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날이 추우나 더우나 불평없이 가족을 위해 성실히 일하고 모은 돈은 한번에 빚탕감으로 사라지고 좌절한 태윤은 정희를 멀리했다. 없는 집 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도 그닥 많은 재산을 갖고 있지는 않은터라 탓하거나 흠으로 여기지는 않았더랬다. 그저 열심히 살며 조금씩 저축하며 살면 평범한 가족은 영위할 수 있겠지 하는 바람으로 소소하지만 그 속에서 얻는 작은 행복으로 만족하며 사는 태윤이었다. 그러나 몇 년간 조금씩 아껴 모은 돈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눈 앞에서 본 태윤을 그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비록 많은 재산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서 많은 소비를 할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빚이라는 것을 져 본적이 없는 집안에서 자신도 남에게 손 벌리는 일 따위 하지않은 것을 두고보면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란 것 쯤은 알고도 남음이다. 그래서 더 미안한 마음이 드는 정희다. 한 푼이라도 자신을 위해 쓴 돈은 없다는 것을 태윤도 알고 있다. 형제간이라도 보증을 서면 안된다는 말을 듣고 아무리 울며 매달려도 마다할 걸... 하는 후회는 해서 무엇하리. 태윤은 정희의 얼굴을 보고 싶지않았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서다. 처갓집도 보기 싫었다. 태윤은 정희를 멀리했다. 태윤은 정희에게 당분간 자기 마음이 풀릴때까지 가만히 내버려두라고 했다. 대답조차 미안해서 입술 끝에 울음을 머금은 채 수화기만 붙잡고 있는게 그저 취할 수 있는 전부였다. 보증 서 주지 말걸, 생활비가 모자라면 모자란대로 살거나 달라고 할 걸, 생활비를 충당하려 카드를 쓴게 잘못이고 보증을 선 탓에 대외적으로 협박을 당해도 더 대출을 받아 막지 말걸, 기억도 안나는 추가 보증도 얘기할 걸, 그랬다면 적어도 오십이 넘은 나이까지 고생하지 않을텐데. 아니, 그냥 콱! 죽어버릴걸! 죽으면 드러나는 빚들이 있어 허탈해해도 보험금으로 모두 충당이 될테니 적어도 돈 때문에 겪는 고난을 없을텐데.. 자신의 처지가 이렇듯 버거워 정희는 칠십이 넘은 엄마 영임이 새벽바람 맞고 세 정거장을 걸어 청소하러 가는 매일을 모른척했다. 그것은 엄마의 삶이고 엄마가 선택한 일이고 엄마와 아빠의 삶이었다. 젊을 때 가족보다 남을 더 지극히 대한 아빠 동만의 최후의 말년이고 엄마 영임의 말년이었다. 영임은 매일같이 걷는 길을 걸을때마다, 월급이 들어오는 통장을 주인집 할머니에게 빼앗겨 월세와 각종 공과금을 제한 나머지 몇 만원, 많게는 십만원대의 돈을 받을때마다 생각했다. ‘벌 받은거야. 그때 그 사람 청혼을 거절해서 죽게 한 벌길이 미끄러 넘어져 디딘 손목이 접질러져 지나던 청소원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날 때 이대로 콱 죽어버렸으면...’ 하고 눈물을 그렁댔다.

 

영임은 남편 동만이 죽고 8평짜리 임대아파트로 들어와 처음으로 따뜻한 겨울을 날 때 그때를 회상하며 부르르 떨었다. “너무 서럽고 힘들어 딱 죽고싶었는데 나 죽으면 니 오빠는 어쩌고 너는 또 어쩔것이냐정희는 눈가가 촉촉해진 엄마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불쌍했다. ‘엄마 새벽에 걸어 청소하러 가는거, 통장 빼앗긴거 알아도 모른척한게... 사실 나도 너무 힘들었어서...’ 그랬다. 그냥 자신도 힘드니까 모른척 한 것이다. 간간이 들러 용돈을 쥐어드리고 장을 봐 주는 것으로 근근히 살림을 살던 영임은 그마저도 없었다면 진짜 죽었을거다 라고 되뇌인다. 주인집할머니는 밀린 월세와 보증금이 다 채워진 13개월이 지날때야 통장을 주었다. 그 사이 월급이 올라 영임은 그때부터 다소 나아진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최소한의 생계에는 턱도 없었지만 워낙 없이 살았던지라 월급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통장을 보면 수억원대 자산가가 부럽지않았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추운 겨울이면 보일러가 얼어터지고, 화장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얼어 넘어지기 일쑤며 좁아터진 화장실에선 샤워조차 힘든 여건이어도 어언 열여덟 해를 살았다. 젊을적부터 남편 동만의 폭력에 시달리던 영임은 쇠약해진 몸을 어거지로 끌며 팔십을 바라보는 지금에 이르러서 더 쇠약해진 몸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동만이 지병이 악화돼 죽고 혼자 된 영임이 병이 짙어진 상황에서 얻게 된 임대아파트로 이사한 날은 영임으로서는 자유를 찾아 떠나는 한 마리 작은 새가 된 날이었다. 지긋지긋한 남편으로부터 벗어나 처음으로 자유를 찾은 영임이었다. 노인 혼자 사는건 위험하다, 외롭다 해도 영임은 혼자인게 너무나 좋았다. 살면서 가장 행복한 하루하를 살고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전에 살던 곳에서 계속 살았다면 끔찍했을거라고 했다. 월세가 말려 주인할아버지에게 갖은 쌍욕을 듣고 집에 들어가지못해 길거리를 헤맨적도 많았다고 한다. 힘들었던 지난날들에 비해서 여름에는 에어컨이 있어 시원하고 겨울에는 난방이 잘 되어 반팔을 입고 지내는 아파트 생활은 산책이나 마트가 없어 불편해도 이 정도면 큰 호강이지 하며 감사해한다. 정희는 친정엄마가 살 아파트 보증금이며 생활에 필요한 가구 일체를 비롯 하다못해 비누곽까지 들여놓으면서 친정엄마의 기뻐하는 얼굴을 보며 덩달아 기뻐했다. 냉장고 가득 먹거리를 채워주고 간간이 용돈도 쥐어드리며 적어도 두달에 한 번씩 꼭 하는 파마염색은 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래서 얻어진 편한 공간에 근심거리가 하나 있으니...

 

《9화 끝》연재:매주 금요일 업로드

 

※ 4주만에 업로드하게 됐습니다. 정희가 친아빠로부터 성추행을 당하는 내용을 담은 후 너무 마음이 아파 뒤의 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친족간 성범죄는 연간 수백건에 달할 정도로 심각합니다. 가정이라는 특성때문에 세상에 드러내기도 쉽지않습니다. 신고되지않은 건수는 더 많을 것입니다. 피해를 입은 딸은 평생을 괴로움에 시달리며 스스로의 낙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정희는 그들을 대변하며 스스로 이겨내려는  힘겨운 몸부림으로 조금이나마 위안을 갖고 또 주려고 합니다. 이 소설은 엄마 영임과 딸 정희의 삶을 들여다보며 여자로서 세상에 살아가는 존재의 이유를 다룹니다. 하지만 쓰면서도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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